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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산행기

천년 불심길 따라서 순천 조계산(曹溪山)

by 새인1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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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시 : 2024년 4월 13일(토요일)

★ 산 행 지 : 전남 순천시 조계산(曹溪山, 888m)

★ 산행지 개요 : 전남 순천의 명산인 조계산(曹溪山)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영암의 월출산(月出山)과 삼각형을 이룬다. 산 전체가 부드럽고 아늑하며 활엽수림이 울창하고 수종이 다양하여 전남에서 우량한 조림용 종자를 채취하기 위해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하였다. 또한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사면에는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인 송광사를 품고 있고, 서쪽으로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표적인 가람이면서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선암사를 안고 있다. 송광사는 합천의 해인사, 양산의 통도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이다.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부른 명산으로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 폭포, 약수 등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불교 사적지가 많아 1979년 12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조계산 산행을 송광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송광사 - 운구재 - 천자암 - 천자암봉 - 송광굴목재 - 연산봉 - 장박골 삼거리 - 장군봉 - 선암사 - 주차장까지 16.1km에 6시간 걸렸다.

 

다녀 온 렘블러 궤적이다.

 

신록의 계절에 송광사로 향하는 길에 연두연두한 신록이 눈을 정화시켜 준다.

 

졸졸졸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 들으며,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僧寶宗刹曺溪山松廣寺)란 표지석이 거대하다.

 

삼보사찰(三寶寺刹)이란 불(佛), 법(法), 승(僧)의 3가지 보배를 간직한 사찰을 이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는 양산 통도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法寶寺刹),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순천 송광사는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 한다.

 

작은 폭포도 눈길을 끈다.

 

연등이 걸린 삼나무 숲을 통과하며,

 

겹벚꽃이 소담스레 피어 반긴다.

 

송광사로 들어간다.

 

하마비(下馬碑)를 지나고,

 

마음을 가다듬고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선사(慧璘仙師)의 의해 창건되었는데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렸으며, 고려 때는 수선사(修禪寺)로 불렸고, 조선시대 때부터 송광사로 정착되었다.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렸고 그에 유래해서 산 이름을 송광산이라 했으며, 이후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 전설에는 송(松)을 파자하면 '十八公'으로 송광사에서 18명의 국사가 나올 것이라고 풀이되는데, 고려와 조선조에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 2명의 국사가 더 배출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스님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단다. 현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로써 3점의 국보와 110점이나 되는 보물 등 무려 600여 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 중 하나이다.

 

曹溪山大乘禪宗 松廣寺, 僧寶宗刹曺溪叢林 이라는 편액은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다.

 

송광사의 본찰로 들어가는 입구인 삼청교(三淸橋)와 우화각(羽化閣)은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고향수(枯香樹)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1158~1210)이 송광사에 처음 오실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라고 한다.

 

 

저 작은 두 개의 전각은 세월각(洗月閣)과 척주당(滌珠堂)으로 뜻을 풀이하면 '달을 씻고, 구슬을 씻는다'는 뜻이 되는데, 죽은 자의 위패를 두고 그 영혼의 속세의 때를 벗기기 위해 그 혼백을 목욕시키는 관욕처(灌浴處)로, 세월각은 여자 영각, 척주당은 남자 영각의 관욕처라 한다.

 

보물 제1467호인 송광사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은 흙으로 빚은 것으로 대형임에도 불구하고 신체 각부의 비례가 어긋나지 않고 사실적 기법이 돋보이는데, 서방 광목천왕의 지물 중에는 보탑 대신 새끼호랑이가 등장하는 등 새로운 도상을 보여줘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사천왕상의 배열은 천왕문의 향 우측으로 비파를 든 북방(北方) 다문천왕(多聞天王)과 검을 든 동방(東方) 지국천왕(持國天王), 향 좌측으로는 당(幢)을 든 서방(西方) 광목천왕(廣目天王)과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南方) 증장천왕(增長天王)이 각각 시계방향으로 북→동→남→서방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네 개의 상 모두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전형적인 분노형 얼굴에 머리에는 용(龍), 봉(鳳), 화(花), 운문(雲紋)이 장식된 관을 쓰고 갑옷을 입은 무인상(武人像)이며, 각기 오른발은 악귀를 밟고 있는데 비해 왼발은 악귀들이 받쳐 든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얼굴 모습은 표정이 분노형으로 강한 인상이기는 하나 볼륨감이 뛰어나 입체적인 면이 돋보일 뿐만 아니라 다소 해학적인 면도 나타난다.

 

오른쪽의 보물 제302호인 약사전(藥師殿)과 좌측의 보물 제303호인 영산전(靈山殿)

 

석가탄신일 준비로 달린 연등 때문에 대웅보전 전각이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본 대웅보전

 

대웅보전에는 삼세(과거, 현재, 미래) 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며, 각 부처님의 좌우에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4대 보살을 모시고 있다.

 

엄청 큰 비사리구시도 보이고, 옛날 송광사가 나라를 대표하는 선종사찰일 때 제사를 지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그때 4천명 분의 밥을 담아 두었던 그릇이라 하며,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라 한다.

 

갈 길이 멀어 송광사 관람은 주마간산격이 되었다.

 

시원한 대숲을 지나고,

 

천자암 방향으로 간다.

 

연두연두한 새순이 아가처럼 무척 예쁘다.

 

육산이라 완만하게 올라간다.

 

 

운구재에 올라서고,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샛노란 피나물이 반긴다.

 

 

드디어 송광사에서 1시간 만에 천자암에 도착한다.

 

 

천자암을 찾는 까닭은 순전히 이 쌍향수(雙香樹: 곱향나무)를 만나러 온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수령이 약 800년인 쌍향수는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고 자랐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는데,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예의 바른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한다. 한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한결같이 움직이며, 나무를 만지면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천자암을 떠나 천자암봉으로 향한다.

 

소담스레 핀 큰구슬붕이

 

화사한 산벚꽃이 발길을 끈다.

 

금창초도 보랏빛으로 반긴다.

 

선암사는 5.5km지만 연산봉을 들러서 장군봉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었다.

 

노랑제비꽃 한 무더기

 

 

천자암봉을 가려면 송광굴목재 방향으로 가야 한다.

 

천자암봉(757.4m) 인증, 송광굴목재까지는 0.8km 남았다.

 

비로소 답답하던 조망이 터진다.

 

가야 할 연산봉과 장군봉이 지척에 보이지만, 연산봉을 들러서 왼편의 봉우리 몇 개를 넘어야 해서 장군봉까지는 한참을 가야 한다.

 

천자암봉에서의 조망

 

송광굴목재로 내려간다.

 

얼레지가 군락을 이루고,

 

송광굴목재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는다.

 

굴목재란 선암사와 송광사를 왕래하는 지름길로 어원은 골막이에서 유래한 말인데, 골막이는 양쪽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산줄기에 나 있는 문과 같은 통로길을 의미하며, 골막이가 굴막이를 거쳐 굴목재로 변한 것이라 한다.

 

해발이 720m이면 상당히 높은 고개인데, 종단이 다른 선암사와 송광사 스님들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로 조계산에는 큰굴목재, 작은굴목재, 송광굴목재가 있다.

 

저기 보이는 연산봉으로 간다.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너덜도 지나고,

 

 

 

얹힌 바위 앞에서 잠시 조망이 트이고,

 

왼편으로 백이산-고동산-깃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중앙에는 지나 온 천자암봉이 우람하고 멀리 보성의 존제산이 희미하다.

 

 

얼레지 대군락이다.

 

헬기장이 있는 연산봉(825m)에 도착한다.

 

조계산(曹溪山)의 연원은 중국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중국의 영남이라고 하는 소주부(韶州付, 지금의 광동성 곡강현)에 있다. 당나라 때 선종의 육조(六朝) 혜능(慧能, 639~713)은 오조(五祖), 홍인(弘忍, 602~675)으로부터 황매산(黃梅山)에서 법을 인가 받았다. 이때 조후촌(曺喉村)의 조숙량(曺叔良)이라는 사람이 혜능을 존경한 나머지 보림사(寶林寺, 지금의 남화선사)의 옛터인 쌍봉(雙峯)아래 대계(大溪)벌에 절을 지어 시주를 하였다. 이에 감동한 혜능은 이 절이 자리잡은 산 이름을 조숙량의 성인 '조(曺)'자와 쌍봉 대계의 '계(溪)'자를 합해서 조계산(曹溪山)이라 지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산 중앙을 흐르는 조계천을 사이에 두고 연산봉을 중심으로 한 송광산과 장군봉을 중심으로 한 조계산으로 나뉘었는데, 고려시대부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불교의 으뜸 단어인 조계(曹溪)를 사용하여 조계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천태종을 이끌고 있던 대각국사 의천이 산 이름을 조계로 바꾼 것은 당시 '조계(曹溪)'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한 종파의 개념이 아닌 중국에서 유래된 조계의 뜻을 의미하는, 모든 승려들의 성지같은 개념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교종으로써 선종을 융섭하고자 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사상이 깃들어 있는 선암사와, 지눌(知訥)스님이 제창한 선종으로써 교종을 융섭하고자 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기반으로 하는 송광사, 유서 깊은 두 산사를 품고 있어 더 유명한 조계산이다.

 

멀리 중앙의 금전산과 나뭇가지 뒤로 보이는 고동산

 

주암호와 강우레이더가 있는 모후산, 중앙에는 무등산이 흐릿하다.

 

반대편으로는 선암사와 상사호, 뒤로는 광양 백운산과 하동 금오산이 보이는데, 흐릿하여 가늠이 안된다.

 

 

연산봉 사거리를 지나며, 이곳에서 작은굴목재로 갈 수 있다.

 

완만하지만 삥 둘러 가느라 먼길이다.

 

 

장박골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나누는 경계지점에 있는 아름다운 골짜기로, 두 사찰의 중간지점 가장 깊은 곳에 남쪽을 향해 자리잡은 조계산을 대표하는 골짜기다. 장막동(帳幕洞)이란 한자 이름에 그 어원이 있는데, 장막(帳幕)이란 장수나 병사들의 막사를, 동(洞)은 우리말에서 골짜기를 뜻한다.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장군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는데, 신비하게도 장군(봉)의 배후 골짜기인 장박골의 모양 또한 둥글게 휘장을 친 장군의 막사가 연상되는 모습이란다.

 

연산봉에서 장군봉까지는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간다.

 

 

등로변에 노랑제비꽃이 힘내라 응원하는 듯하다.

 

 

접치 갈림길을 지난다.

마지막 865봉과 장군봉으로 향한다.

 

865봉은 옆으로 돌아서 앞에 보이는 장군봉으로 향한다.

 

막판이라 힘들지만 서서히 올라간다.

 

장군봉에 올라서니 화사한 진달래가 반긴다.

 

지나 온 연산봉 줄기 너머로 보이는 모후산과 무등산

 

지나 온 천자암봉과 연산봉

 

조계산 장군봉(888m) 인증, 조계산 장군봉은 잔주름 없이 우람하게 솟아 좌우로 균형있게 거느린 줄기에 의해 장군대좌(將軍大座)라는 경칭으로도 불린단다.

 

돌탑이 지키고 있는 장군봉

 

이젠 선암사를 향하여 가파르게 내려간다.

 

예쁜 진달래와 멀리 상사호를 조망한다.

 

당겨 본 선암사와 상사호

 

막판에 돌길이라 무척 힘들다.

 

 

향로암터를 지나며,

 

너덜지대도 통과한다.

 

 

 

대숲을 만나면 다 내려온 것이다.

 

천태종의 조사인 대각국사 의천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각암에 들러간다.

 

전각 뒤편에는 보물 제1117호인 대각암 승탑이 날렵하게 서 있다.

 

핑크색 금창초도 만나고,

 

고려 중·후기에 만들어진 '선암사 마애여래불'은 길 왼편으로 높직하게 서 있는 암벽에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인데,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작품은 아니지만 높이가 5m로 전남지역에서는 큰 마애불상 중 하나이다.

 

표정과 머리 장식이 독특하고 이국적인 인상마저 풍긴다.

 

드디어 천년고찰 태고총림 선암사(仙巖寺)에 도착한다.

 

선암사는 542년(진흥왕 3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도도량(修道道場)으로 유명하다.

 

겹벚꽃이 한창이다. 선암사는 산자락을 타고 전각들이 지어져 있기 때문에 경내 비탈진 곳마다 여섯 곳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조경적 기능과 동시에 큰비를 대비한 홍수 조절 역할을 위한 토목적 기능을 한다고.

 

그 유명한 뒤깐은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해우소이다.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시의 내용대로 해우소에 쭈그려 앉아 보지는 못해서 아쉽다.

 

이 와룡송(臥龍松)은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사찰을 중창할 무렵에 심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수세를 보면 그리 오래돼 보이지는 않는다.

 

무량수각이라는 추사체도 보이고,

 

선암사​(仙岩寺)는 절 주변에 있는 10여장 되는 큰 바위에 옛 선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 하여 선암(仙岩)이라는 설과, 조선 숙종때 호암선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장군봉 배바위에 올라 기도를 올렸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낙심하여 몸을 바위 아래로 날렸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선사를 받아 배바위에 올려놓고는 '나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보리심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단다. 호암선사는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지어 그때 보았던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정자각 형태의 원통전에 봉안하였는데, 그후 사람들은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선암사로 불렀다고 한다.

 

호암선사의 전설이 전해지는 원통각(圓通閣)은 중생구제를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한다.

 

또한 아들이 없던 정조대왕이 선암사 눌암대사에게 백일 기도를 드리게 한 후 아들(순조)을 얻게 되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순조가 12살 때 쓴 '人', '天', '大福田'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현재 건물 내부에 그 현판이 걸려 있다.

 

 

겹벚꽃에 치여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선암매(仙岩梅)는 꽃도 이미 지고 없는데, 수령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약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령 매실나무로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 선현들은 고매(古梅)의 조건으로 가지에 붙은 꽃이 많지 않아야 하고(稀), 나이를 먹어야 하고(老), 줄기와 가지는 마른(瘦) 매화의 꽃봉오리 형상으로 등위를 매겼는데, 500~600년 묵은 선암매는 고매가 지녀야 할 이런 품격을 잘 갖추고 있다고 한다.

 

무우전과 팔상전 사이에 심어져 있는 백매와 홍매 20여 그루가 선암사 최고의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역시 꽃피는 시기가 지났다.

 

보물 제1311호인 대웅전, 현판 글씨는 조선말 세도정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트렸던 안동김씨의 수장이며, 순조임금의 장인인 김조순의 글씨라고 한다.

 

선암사를 3무(三無) 사찰이라 하는데 첫째로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는데, 이는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이라 칭하여 장군이 지켜주기 때문에 불법의 호법신인 사천왕문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협시보살상이 없는데,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탐진치 삼독을 멸하고 마구니에게 항복 받았으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서 협시보살상을 두지 않았다. 세번째는 어간문(於間門)이 없는데,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정중앙에 있는 문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정중앙의 문에도 사람 출입이 가능하지만, 선암사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어간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주존불 좌우로 협시보살이 없는 석가모니불이 계시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 제1419호)은 조선 영조 29년(1753) 작품으로 조성연대와 화원(쾌윤)이 명확한 작품이란다.

 

대웅전 앞에는 한쌍의 삼층석탑이 있는데, 보물 제395호이다.

 

만세루 건물 뒷면에 있는 현판 글씨 육조고사(六祖古寺)는 달마대사가 살았던 육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절이라는 뜻으로, 서포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의 글씨라고 한다.

 

예서체 글씨의 굳셈과 멋짐을 한껏 발휘한 글씨로 특히 육(六)자의 가로 획에 삐침을 구사하여 자칫 딱딱해 보이는 글자에 친근한 멋을 더했다.

 

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란 현판은 현대의 명필가이면서 순천시민인 목인 전종주님의 글씨라 한다.

 

총림(叢林), 단림(亶林)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한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 숲과 같다 하여 선원과 강원,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로 총 6개의 총림이 있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에 태고총림이 있다.

 

고청량산해천사(古淸涼山海川寺)는 조계산 선암사의 옛 이름이고 풍관산인 안택희의 글씨다.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은 보물 제2201호로 지정(2022년 12월 지정) 되었으며, 조계문으로도 불린다. 건물의 구조는 단칸 맞배지붕과 다포식 공포로 되어 있으며, 기둥 구조는 기둥과 창방(기둥 상부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가로 부재)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선암사 일주문이 처음 만들어진 기록은 확인할 수 없으나 1540년 중창됐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기록을 볼 때 중창 이후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 선암사에서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건축물로 의미가 더 크다.

 

선암사는 2018년 6월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해남 대흥사, 안동 봉정사, 영주 부석사, 양산 통도사 등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조계종과 태고종이 공존하는 선암사

 

태고종 총본산인 선암사는 또한 조계종 20교구의 본사이기도 하다. 최근 조계종이 교구본사 지정을 해제하고 직영사찰로 전환하였지만, 선암사는 오랫동안 조계종과 태고종의 '조·태 갈등'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양측 스님들의 주먹다짐을 부르기도 하였다. 선암사에 얽힌 갈등의 역사는 1954년 비구승-대처승 싸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발표한 '(결혼한) 대처승은 사찰을 떠나라.'는 유시(담화문)를 등에 업은 비구승들이 일제 강점기 득세했던 대처승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권력 투쟁은 결국 1970년 조계종으로부터 대처승 중심의 태고종의 분리 독립으로 결론났으며, 현재는 오랜 갈등 끝에 조계종과 태고종이 선암사를 공동 인수하여 공동·관리하고 있단다.

 

자주괴불주머니 흰꽃이 청초하다.

 

아담하고 예쁘게 생긴 이 연못은 삼인당(三印塘)이라 한다.

 

삼인당(三印塘)은 신라 경문왕 2년(862년)에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으로, 삼인(三印)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등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루는 세가지 진리, 즉 삼법인(三法印)을 말한다.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음으로 이를 알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불교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유래는 뒷산이 거북이 형상의 귀봉(龜峯)인지라 거북이에게 필요한 물을 주기 위해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에 거북의 알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거북이에게는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이 없을 경우 자손이 끊기는 것을 의미하게 되며 이에 따라 거북이에게 자손을 이을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 섬을 만들어 비보하였다고 한다.

 

강선루는 신선들이 내려와 목욕재계하고 승선한다는 의미로, 누구라도 속계에서 선계로 들어와 열심히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준다고.

 

보물 제400호 승선교(昇仙橋)는 고통의 속계에서 부처님의 선계로 드는 상징적인 다리로 모든 중생들을 보호하고 수용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단다. 승선교는 1713년(숙종 39년) 호암대사가 처음 쌓았으며 순조 24년 해붕대사가 중수하였다. 자연암반 위에 다리를 올렸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균열이 생기면서 지난 2003년 말 해체해서 다시 쌓았다.

 

다리 아래 중앙에는 불쑥 튀어나와 있는 용머리가 있는데, 이는 다리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심축에 해당하며, 엽전 세 냥이 걸려 있는데 언뜻 보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호암대사가 돌다리를 쌓기 위해 시주를 받았는데, 시주 받은 돈을 돌다리 만드는데 쓰고나니 세냥이 남았다고 한다. 호암대사는 시주한 금품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용의 머리에 걸어두었는데, 이는 나중에 돌다리를 보수할 일이 생기면 그때 쓰라는 의도라고 추측한다.

 

사천왕을 대신하는 선암사 장승의 좌측에는 방생정계(方生淨界)라 써 있는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푼다는 뜻이고, 우측의 호법선신(護法善神)은 불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라는 뜻이다.

 

승탑밭을 지나며,

 

조계산문을 나서며,

 

조계산 선암사는 선교양종 대본산이다.

 

계곡물에 발바닥 식히고,

 

운치있는 선암사 진입로는 1.2km에 달한다.

 

느티나무 거목이 배웅한다.

 

주차장으로 빠져나와 6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감한다.

 

나오는 길가에서 바라 본 호수에 메마른 갈대가 멋지다.

 

새들의 먹이가 풍부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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