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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서태후의 향락과 사치를 보여주는 북경 이화원(頤和園)

by 새인1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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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일시 : 2024년 5월 31일 ~ 6월 3일(3박 4일)

♥ 여 행 지 : 중국 북경 이화원(頤和園), 현공사(懸空寺), 항산(恒山, 2,016.1m), 백석산(白石山, 2,096m) 트레킹

♥ 이화원 개요 : 서태후의 향락과 사치를 보여주는 이화원(頤和園)은 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으로 총 면적은 2.9 km²에 달하며,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황실 정원이자 중국 조경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으며, 중국 국가 5A급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고, 199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청나라의 여름 궁전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황가원림인 이화원은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서호(西湖)라 불렀는데, 청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 눈에 들면서 황실원림인 청의원(淸漪园)으로 조성한 것이 시초였다. 원명원이 완공되었을 때 건륭제는 더 이상 국고를 낭비하면서까지 원림을 조성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스스로 어겼다. 1750년 어머니 황태후의 60세 생신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청의원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764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후 2차 아편전쟁으로 파괴된 궁을 서태후(西太后, 1835~1908)가 1888년에 재건하면서 이화원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서태후가 18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수렴청정하며 거주한 곳이다. 이화원의 대부분을 이루는 곤명호(昆明湖)와 만수산(萬壽山)은 이때 조성되었는데, 폐허가 된 원명원을 복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태후가 해군 창설을 위해 마련된 예산중 은 2,400만 냥을 유용해 자신의 여름 궁전을 조성했다. 이곳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청일전쟁의 패배를 무력한 해군 탓으로 보는 중국 입장에서 서태후는 개인적인 탐욕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한 인물로 꼽힌다. 반면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이화원은 '옛 중국인들이 건축에 품은 이상'을 여실이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옛 중국인들 관념 속 지상 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화원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부지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쿤밍호(昆明湖)를 비롯하여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던 궁전 구역, 아름다운 누각, 우람하게 자란 고목, 관상용 태호석, 아치형 다리, 종교적인 건축물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황실원림으로 '황실정원 건축박물관'이라고도 불린다.

 

1달 만에 다시 3박 4일 중국 항산 - 백석산 트레킹을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후,

 

아침 10시 25분발 북경항공을 타고 인천공항을 날아오르니 공항 청사가 멋지게 보인다.

 

멋진 구름의 향연

 

서해상에 위치한 백령도와 대청도를 지나가며,

 

북한땅을 당겨본다.

 

기내식 한 번 먹고 나니 중국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넓은 텐진(天津)시 위로 날아간다.

 

 

베이징(北京)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하고,

 

베이징에 있던 공장들을 전부 산둥반도쪽으로 이주시켰다더니 베이징 하늘은 무척 맑아진 대신, 우리나라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고역을 치른다.

 

 

인천에서 2시간여 만에 베이징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한다.

 

점심식사 하러 왕징으로 가는 도중에 도로변에 백양나무가 울창하다. 백양나무는 회화나무와 함께 베이징시목이라 한다.

 

왕징(望京)은 코리아타운이란다.

 

북경에 왔으니 그 유명한 북경오리구이를 먹어 보라는데, 맛집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평범하다.

점심식사 후 서태후의 여름 별장인 이화원(頤和園)으로 관람하러 간다.

 

이화원(頤和園)의 이(頤)자는 '턱이'로서 어려운 한자인데, '노인들의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온화하게 한다.'는 뜻의 이양충화(頤養衝和)에서 따온 말로, 영어로는 'Summer Palace'로 번역한다. 한 마디로 이화원은 오로지 서태후의 기승전(起承轉) 만수무강이 반영된 향락과 사치의 결정판이다.

 

서태후의 본명은 혜옥란으로 시에 능하고 정치적 야망이 큰 여인인데, 13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17세 때 궁녀로 들어와 19세에 후궁이 되었으나, 3년간 한 번도 황제의 수청을 들지 못했다. 당시 황제의 잠자리 시중은 붉은 천으로 싸둔 대나무 조각 이름표를 뽑는 형태였기 때문에 2천명의 궁녀 중에서 뽑히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사진 출처: 위키 백과)

 

이에 황제 주변의 환관을 매수하여 황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연명천'이라는 것을 알아낸 후, 황제가 다니는 길목에서 그 노래를 불러서 황제의 수청을 들게 되었고, 재순황제를 낳은 후 비가 된 다음 태후자리까지 올라 천하를 호령한 서태후가 되었다.

 

함풍황제가 죽자 6세의 어린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였고 의귀비였던 서태후는 자희황태후에 봉해졌다. 이후 아들의 수렴청정을 시작으로 48년간 권력을 쥐고 흔들다가 74세에 사망한 여인,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인자했던 동태후가 먹은 만두에 독약을 넣어 독살시킨 그녀는 대단한 지략가요, 야심가로 숱한 일화를 남긴 중국 역사속의 3대 악녀에 속한다.

 

한 끼 식사에 220여 가지 음식을 세 개의 테이블에 차려놓고 첫 번째는 구경하고, 두 번째는 맛을 보고, 세 번째로 식사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요리사들이 안 먹는 음식을 요리할 때는 대충 재료를 쓰고 빼돌린 재료를 착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과일은 몇십kg을 쪼개서 냄새만 맡고 버리고, 우유를 수없이 먹어 50대까지도 얼굴에 주름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화원에서는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서태후가 아기 엄마의 젖을 다 먹어버려서 아기들에게 줄 모유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유와 모유를 병행하여 먹고 산 여자 서태후는 건강하고 잘생긴 산모의 젖을 빼앗아 먹은 비정한 여자다. 위안스카이(袁世凱) 총통이 서태후에게 선물한 독일제 자가용을 타고 다닌 그녀는 운전사에게 무릎을 꿇고 운전을 시킬 만큼 권위를 앞세운 잔인한 여자였다.(사진 출처: 위키 백과)

 

이런 연유로 이화원은 국고를 축내고 백성들의 고혈로 조성하여 원성이 컸지만, 지금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아름답고 자랑스런 중국의 문화유산이 되었다는데, 이화원은 원래 청나라 건륭황제가 어머니 회갑선물로 지어준 여름별장 겸 피서별장으로, 처음에는 자연호수였으나 차츰 확장시켜 전체 면적의 3/4이 인공호수가 되었다. 서태후가 해군 창설을 위해 마련된 예산중 은 2,400만 냥을 유용해 조성한 여름별장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며 중국에서는 맨 처음 전기가 들어온 곳이란다.

 

이화원 배치도(펌)

 

이화원의 정문인 동궁문(東宮門) 앞에는 한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을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렀다.

 

문위에 걸린 '이화원(頤和園)'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며,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단다.

 

오른쪽 여의주를 밟고 있는 숫사자

 

왼쪽에 있는 암사자는 새끼를 밟고 있는데, 후손을 번창시키라는 뜻이란다.

 

한자와 만주어로 써 있는 인수문(仁壽門)으로 들어간다. 인수문은 정치활동구의 중심인 인수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원내의 양편에는 남북 9경방(九卿房)이 설치되어 있는데 청나라 대의 9경(九卿)과 6부(六部)의 수직실이다.

 

인수문 앞에 있는 태호석(太湖 石)은 지금의 북경대학에서 옮겨온 돌로 푸른 색상에 윤기가 나고 조형이 기이하며, 생김새가 마치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고 부른다. 태호석은 석회암이 용해(溶解)하여 기형(奇形)을 이룬 덩어리돌로 정원이나 화분 등의 관상용으로 쓰이는데, 중국의 태호(太湖)지방에서 나는 것이 가장 기이하고 아름답다고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동궁문을 통해 들어오면 첫번째로 만나는 건물인 인수전(仁寿殿)은 원래 황제가 조회를 열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옥좌가 마련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광서제를 수렴청정한 서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내부는 자금성의 황궁처럼 꾸몄지만, 대전 앞뜰에는 회화나무와 측백나무를 심고 태호석으로 장식해 원림 분위기를 살렸다.

 

인수전 앞에 설치된 청동 기린상, 사악함을 퇴치한다는 상상의 동물인 기린(麒麟)은 중국 전설 속의 동물로, 인수(仁獸)라고도 한다. 용머리에 사슴의 뿔, 사자의 꼬리와 말의 발굽, 온몸은 비늘로 덮여 있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용과 말이 교합하여 생겨난 상상의 동물로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이라 하는데, 기린은 모든 동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간주하였으며, 성인(聖人)이 태어날 때 그 전조로 나타난다고 한다. 기린의 전설과 상징성 때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고 한다.

 

인수전 앞에는 용과 봉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태후의 상징인 봉황을 용보다 더 돋보이는 위치에 두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과시했단다.

 

그렇게도 오래 살아서 마음껏 권력을 누리려고 했던 서태후가 당시로서는 드문 74세 천수를 누렸지만,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런 폭정에 대한 인과응보로 치욕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한자와 만주어로 써 붙인 인수전 편액 아래 걸린 대원보경(大圓寶鏡) 역시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이란다.

 

인수전(仁壽殿)은 1750년(건륭 15)에 지어질 때는 근정전(勤政殿)이었다가 광서제 때 재건하면서 인수전으로 개칭했으며, 동향으로 된 정면 9칸의 전각이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돌보며 외국 사절과 그들의 부인을 접견했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중국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용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인수전 북쪽에 놓인 우물 연년정(延年井)

 

암튼 인수전은 광서황제에게는 참담한 장소로 어린 시절은 서태후의 수렴청정으로 무늬만 황제였고, 친정시기에는 서태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개혁을 추구하다 실패하여, 옥란당에 유폐된 후 인수전에는 거동조차 하지 못한 우울한 황제였다.

 

인수전 앞뜰의 용발나무는 회화나무를 어릴 때부터 가지를 잘라주어 키가 크지 못하게 하고 가지를 꼬불꼬불하게 만들어 저런 모양이 되었다고 하는데, 불현듯 여성들의 발을 크지 못하게 옥죄던 전족(纏足)이 떠오르면서, 한편으로는 서태후의 꼭두각시 노릇하느라 불운한 성장기를 보낸 어린 황제들의 모습을 보는 듯도 하다.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측백나무는 예로부터 신선이 되는 나무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고, 또 벌레가 생기는 걸 없애준다고 한다.

인수전 옆 호숫가에 위치한 지춘정(知春亭)은 해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호수의 얼음이 이곳부터 녹기 시작하여 사람들에게 봄소식을 알린다 하여 지춘정이라 하는데,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는 2층 누각이다.

 

멀리 만수산(万寿山) 중턱에 보이는 불향각(佛香阁)은 이화원의 상징적인 건물로 이화원의 중심이자 나침반 역할을 한다.

 

만수산(万寿山)의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불향각은 1891년에 은화 78만 냥을 들여 지은 것으로 이화원 내 최대 공사로 꼽힌다는데, 밑에서 보면 황금색 유리기와가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산 위에 세워져 더 웅장해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곤명호가 드넓게 펼쳐지고 원림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는데, 오늘 래원으로 4시간을 이동해야 해서 시간이 촉박하여 들르지 못해 아쉬웠다.

 

예쁜 청나라 아가씨와 인증을 하고,

 

둘이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무척 아름답다.

 

멀리 보이는 십칠공교(十七孔桥)는 이화원 최대의 돌다리로 무지개처럼 생긴 아치형 다리의 길이가 150m에 달한다. 동쪽 제방과 남호도를 연결하며, 난간에는 544마리에 달하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의 크기와 생김새가 달라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들르지 못해 아쉬웠다.

 

호수 가운데 조성한 남호도(南湖島)는 인공섬으로 중국 전역의 잘 생긴 어린 남성들을 남호도로 불러들여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부름을 받아 낙수당에 들어가면, 그 누구도 살아서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니 서태후는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악녀였다. 음기 팔팔한 서태후가 젋은 나이에 과부가 되자 젊고 잘 생긴 남자들을 끌어 들였는데,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워 혀를 자르고 팔도 자르고 나중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다고 한다니, 이런 센 음기가 두려워 중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정상들이 이화원 방문을 사절한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단다.

 

멀리 보이는 원탑은 현재 중국 고위관료들의 별장이란다.

 

이화원 풍경

 

문창각(文昌閣)은 건륭제 15년인 1750년에 창건되었고 광서제 때 재건되었는데, 이화원 내 6개의 성곽 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누대 위에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문창(文昌)이란 본래 별이름으로 문곡성(文曲星)이라 부르지만, 도교(道敎)에서 문곡성은 바로 인간세상의 공명(功名)을 주재하는 신으로 '문(文)'을 상징한다.

 

필체가 보통은 넘는 듯한데, 이렇게 길바닥에 앉아서 물로 글씨를 쓰는 이유는 강태공이 낚싯대로 세월을 낚듯이 자신을 알아줄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동문으로 들어서면,

 

옥란당(玉澜堂)은 광서제 때 중건된 황제의 침궁이었는데, 청일 전쟁의 패배로 큰 충격을 입은 광서제가 1898년 무술년에 정부, 행정, 교육, 법률, 경제, 군대를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변법자강운동 칙령을 내렸던 곳으로, 친정도 거부하는 광서제가 두려웠던 서태후가 외세를 배척하는 의화단을 끌어들여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결국 야심가 서태후는 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광서제를 이곳에 유폐시켰으며, 광서제는 이곳에서 10년간 유폐 생활을 하다 서태후에게 독살당했다는데,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

 

서태후(西太后)는 함풍제의 궁녀 출신 세번째 황후이며 섭정 황태비이고, 동치제의 생모이자 광서제의 이모로서 청나라 말기 48년에 걸쳐 정치의 실권을 쥐었다. 그녀의 아들인 동치제(同治帝)는 5세에 즉위하여 19세에 성병으로 사망하였으며, 동치제의 뒤를 이은 그녀의 조카 광서제(光緖帝)는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로 4세에 즉위하여 14년 섭정 후, 9년 친정기간에 무술정변으로 10년 유폐 중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는데, 일설에는 서태후가 독살하였다고 하며 성기능 장애로 자식도 없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는 2세에 즉위하여 일본의 꼭두각시인 만주국의 집정 및 황제(1932년~1945년)였고, 말년에는 정원사로 일하다가 1967년 61세로 사망한 비운의 황제였다.

 

장랑으로 간다.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의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고, 4살 때 상진촌의 송사원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로 바꿨으며, 12살 때 다시 노안부 지부 혜징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2년 예허나라(葉赫那拉) 혜징의 딸로 입양되어 예허나라씨 문중에서 궁녀로 선발되어 17세의 나이로 입궁하였다.

 

궁녀시절 그녀는 원명원의 어감내시들을 포섭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는데, 산책을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랫소리에 이끌려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마침내 아들을 출산하기에 이르렀다. 황후에게 후사가 없이 함풍제가 죽자 6살의 어린 아들 동치제를 즉위시켜 그 생모로써 황후로 올라간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이후 48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선황제의 본처인 동태후[자안(慈安)태후]는 성품이 어질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서태후의 전횡을 걱정한 함풍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에게 밀서를 내려 서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면 서태후를 죽여버리라고 하였다.

 

이 밀서의 존재를 안 서태후는 꾀를 내서 동태후가 감기를 앓고 난 후 팔에 붕대를 감고 문병을 가서는 '언니가 몸져 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거라 해서 내 피를 약에 넣어 언니한테 대접했더니 과연 언니의 병이 나아졌다.'고 했다. 원래부터 성품이 어진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며 '동생이 이토록 나를 생각하는데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하면서 함풍황제의 밀서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급변하여 동태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태후는 서태후가 보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하니 서태후는 악녀(惡女) 중의 악녀였다.

 

낙수당(乐寿堂)은 서태후가 기거하던 침궁으로 이화원에서 보석과 비단 등으로 가장 화려하게 꾸민 곳이라 하는데, 매일 어린 남성들을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쿤밍호가 펼쳐지고, 뒤로는 만수산(万寿山)이 버티고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건륭제가 최초로 건립했던 건물은 함풍제 때 파괴되고, 1887년 서태후가 재건했단다.

 

낙수당은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智者樂, 仁者壽)'는 논어 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정면에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앞에 놓인 청동 사슴, 학, 항아리는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는데, 암튼 기승전(起承轉) 서태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였다니, 그래서 오래 살았나 보다.

 

정원수로는 서태후의 이름인 옥란과 발음이 비슷한 목련이 간택되었다고.

 

낙수당(乐寿堂) 앞에 설치된 기암괴석은 청지수(靑芝岫)라 불리는 중국 최대 크기의 원림치석(園林置石, 수석)으로, 명나라 시절 관료가 발견하여 개인 정원으로 옮기던 중 비용이 너무 들어 버린 것을 건륭황제가 매입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청일전쟁시 패배한 장수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태후에게 뇌물로 바치기 위해 가져온 것으로 너무 커서 이화원의 문과 벽을 부순 다음 설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크기가 워낙 커서 문을 통과하지 못하자 문을 부수고 운반하는 일에도 많은 돈이 들어가서 패가석(敗家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그러니 이런 돌은 황궁이 아니면 설치할 수 없다는 위엄이 서린 듯하다.

 

이제 장랑의 출입구 요월문(激月门)으로 들어간다.

 

장랑(長廊)은 건륭제가 어머니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통로로, 낙수당 서원(西院)에서 시작해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 길이 728m, 273칸 짜리 길다란 회랑이다.

 

또한 장랑의 들보에는 1만 4천여 폭의 소식채화(蘇式彩畵)로 된 그림이 있는데, 항저우 서호의 풍경을 비롯해 꽃과 나무, 곤충, 새, 산수와 서유기, 삼국지연의, 수호전, 봉신연의, 요재지이 등 고전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이라 한다.

 

 

장랑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길고 아름다운 회랑으로 서태후가 비를 맞지 않고 곤명호를 산책할 수 있는 곳인데,  가마만 타고 다니던 서태후가 유일하게 제발로 걷던 길이라 한다.

 

또한 겨울에는 바닥이 차지 않게 불을 때는 아궁이도 설치되어 있다.

 

지금은 좀 퇴색되었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호화찬란 했을지 그야말로 꿈의 궁전이었다.

사계절을 상징하는 유가정(留佳亭), 기란정(寄瀾亭), 추수정(秋水亭), 청요정(清遙亭) 등 4개의 정자가 설치되어 있다.

 

만수산 중턱에 있는 목탑 모양의 불향각(佛香阁)과 산 정상의 불당인 지혜해(智慧海)는 이화원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예술의 걸작으로 불향각 1층에는 천수천안보살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건륭제가 어머니께 경극을 감상하게 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내부에는 2층으로 된 무대가 있으며, 고대 사람들이 꾀꼬리의 소리를 음악의 아름다움으로 비유하여 청리관(聽鸝館)이라 불렀다. 1860년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화재로 훼손되었으나, 광서 연간에 재건되었으며, 덕화원 대회루를 만들기 이전에 서태후는 늘 이곳에서 경극을 보고 연회를 베풀었다. 현재는 궁중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되었는데, 수백 명의 국가 지도자와 고위 정부 관료들이 잇달아 이곳에서 국가행사를 거행하면서 중국의 유명한 궁중요리 전문 레스토랑이 되었단다.

 

 

드디어 도착한 청안방(清晏舫)은 서태후의 정치적 야욕을 상징하는 돌배로, 석방(石舫)이라고도 부른다. 장랑의 서쪽 끝 곤명호에 떠 있는데, 대리석으로 조각해 만든 배의 길이가 36m에 달한다. 배 위에는 역시 돌로 만든 2층 누각이 있는데, 영원한 권력을 갖고 싶었던 서태후는 순자(荀子, BC 298~238)의 경고가 두려웠는지,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즉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어 가라앉게도 한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물결에도 뒤집히지 않는 돌배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데, 하지만 돌이 물 위에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4개의 지지대가 밑에서 돌배를 받치고 있지만, 지지대가 붕괴되면 배는 언제든 가라앉기 마련인데, 민심에 귀를 닫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청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암튼 권력의 무상함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현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최고의 문화재요 관광자원이 되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궁인들의 복식인 듯하다.

잠시라도 황제가 된 기분일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일렁이는 쿤밍호(昆明湖)는 여전히 아름답다.

 

불향각으로 오르는 문인데, 시간상 패쓰한다.

 

불향각(佛香閣)은 만수산 앞산 비탈 높이 20m에 기단을 쌓아 만든 41m(총 높이는 61m)의 8각 4중 처마의 3층 목탑으로,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건물로, 강남의 황학루를 본떠서 지었단다.

 

 

다양한 문양의 멋들어진 장랑의 창문이 참 예쁘다.

 

 

 

전각 앞의 회화나무들이 멋진 자태를 보여주지만, 이화원의 횡포를 보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빨간 딱지가 붙은 나무들은 수령 300년이 넘은 나무라 한다.

 

덕화원(德和园)은 경극을 좋아하는 서태후를 위해서 경극 공연장으로 꾸민 대희루(大戏楼)가 있는데, 건륭제가 지은 것을 서태후가 자신의 취향대로 개조했다. 3층으로 된 덕화원 맞은편에 서태후가 앉아서 경극을 관람했던 이락전(颐乐殿)이 있으며, 그녀는 이화원에 도착한 다음 날에는 반드시 경극을 보았다고 한다. 후궁과 공주들은 가까이 동석시키고, 광서제는 복도쪽 자리를 내주었다고 전해진다. 덕화원은 자금성의 창음각(畅音阁), 피서산장의 청음각(清音阁)과 함께 청나라 3대 경극공연장으로 꼽힌다. 여행객들을 위해 하루 6회 맛보기 경극이 공연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갈길이 바빠서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관람을 마치고 나온다.

 

다음 행선지인 래원으로 가려면 4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하늘의 구름이 멋지다.

 

붉게 물드는 노을이 아름답다.

 

래원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첫날 일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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