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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자연 여행의 성지 노르웨이(Nerway)- 스타방에르 탐방

by 새인1 202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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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웨이 제4위의 도시인 스타방에르(Stavanger)는 노르웨이 남서부 스타방에르반도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로갈란주(Rogaland)의 주도이며,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8세기에 건설되었다. 스타방에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빙하기가 끝나면서 얼음이 녹아내린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9~10세기 스타방에르는 도시 외곽의 예렌(Jæren)이 경제와 군사 중심지였고, 12~14세기에는 교회 행정과 노르웨이 남서해안의 상거래 중심지로 발전했다. 1120년대에 접어들면서 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스타방에르 대성당을 완공한 1125년을 도시가 출범한 공식연도로 삼고 있다. 통조림과 조선, 해운을 주요 산업으로 삼아오다가 1969년 북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석유산업 중심지로 선정된 뒤 눈부신 성장 가도를 달렸다. '석유의 수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도시권 인구는 약 32만 명으로 노르웨이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석유 산업의 중심지이다. 실업률이 매우 낮아 노르웨이와 유럽 평균 실업률을 밑돌고 있으며,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하나로 꼽히며 노르웨이 최고의 미식 도시로도 유명하다. 서쪽으로는 바다에 접해 있고 북동쪽으로 보크나피오르(Boknafjorden), 동쪽에 뷔피오르(Byfjorden)와 간즈피오르(Gandsfjorden)가 있다. ♬♬

 

 

스타방에르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프레이케스톨렌 트레킹을 마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스타방에르는 대학도시이자 고등교육기관 및 연구기관의 본거지이기도 하며, 노르웨이 미식문화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7월 말에 개최되는 글라맛(Gladmat)축제는 매년 약 25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스타방에르의 대표적인 축제이며,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관광명소를 도보로 여행할 수 있다.

스타방에르 첫 번 째 방문지는 세 개의 칼 조형물이 있는 하프스 피오르 인근의 해변이다.

이 탑은 스타방에르 하프스 피오르지역에서 벌어진 노르웨이 독립을 위한 여러 전투를 기리기 위해 1983년에 노르웨이 로가란드은행 후원으로 작가 올라프(H. M-Kong Olav)가 '세 자루의 칼'을 제작해 이곳에 설치한 것이다.

 

 

반영 담으러 돌다리를 건넌다. 돌다리가 미끄러워 조심조심,

 

노르웨이는 10세기를 전후해 등장한 하랄1세(Harald1, 850~932)가 국가의 통일기반을 조성했고, 이후 1015년 올라프2세(OlafⅡ, 995~1030)가 노르웨이를 통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2세기에 접어들어 왕위를 둘러싼 내부갈등이 전개되지만 1217년 호콘4세(Haakon, 1204~1263)의 등장으로 내란은 평정되고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호콘4세 시기에 절대왕정의 기반을 닦고 통일의 기운을 바탕으로 국운이 뻗어가기 시작한 노르웨이는 13세기 중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등을 점령하고 정착하면서 해외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왕정을 기반으로 한 노르웨이의 운명은 후손을 얻지 못하면서 어려워졌으며, 결국 덴마크와 연합국가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 노르웨이는 덴마크, 스웨덴과 칼마르 동맹을 맺으면서 점차 정체성을 잃게 된다. 1397년부터 1523년까지 126년간 유지된 칼마르 동맹으로 인해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놓이고 만 것이다.

 

1380년 노르웨이는 덴마크에 흡수되고, 1397년 덴마크의 에리크 7세(ErikⅦ, 재위:1396~1439)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공동군주로서 노르웨이에서는 에리크 3세(ErikⅢ, 재위: 1389~1442)로, 스웨덴에서는 에리크 13세(ErikⅩⅢ, 재위: 1396~1439)로 즉위하여 덴마크를 중심으로 한 칼마르 동맹이 완성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노르웨이가 쌓아온 해외원정의 업적들은 모두 덴마크 왕가의 업적으로 치환되어 버렸고,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등 노르웨이의 해외 정착지까지 덴마크가 접수해 버린 것이다. 이제 모든 권한과 권리는 덴마크가 행사하게 되었고, 칼마르 동맹은 15세기 중엽부터 구스타브1세 바사(GustavⅠVasa, 1496~1560)가 이끄는 스웨덴 독립군이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Ⅱ, 1481~1559)를 격파하고 1523년에 독립을 이루자 해체된다.

 

1814년 덴마크는 스웨덴의 침공을 받고 킬조약에 따라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는데, 이때 노르웨이가 독립을 선언하지만 스웨덴은 노르웨이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고, 오히려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정복했다.

 

결국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모스조약을 체결하고 두 나라가 연합국임을 선언하며 공식적으로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1905년 두 나라의 연합이 와해되고, 스웨덴은 결국 노르웨이의 독립 요구를 받아들였다. 노르웨이의 오랜 숙원이었던 독립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세자루의 칼과 바위가 비친 반영도 멋지다.

물 속에 비친 반영도 멋지다.

 

칼자루를 거머쥐고 호령해본다.

 

쑥방망이 버젼으로 담고,

시내로 나오니 화려한 도시투어 버스가 연신 돌아다닌다.

 

약한 비가 내리는 브레이아 호수 주변의 풍경도 멋지다.

 

 

시내버스가 무척 길다.

 

호수 건너 예쁜 주택들이 보인다.

 

저기가 스타방에르에서 가장 번화한 스카겐 광장 (Skagenkaien)​​이고,

 

우린 구시가지로 간다. 비가 내리는 모습도 연출로 담아서,

 

 

 

 

 

스타방에르 올드타운에 도착하여,

 

이곳은 감레 스타방에르(Gamle Stavanger)라 불리는 오래된 주택지역인데, 주로 18세기경 지어진 흰색 목조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유럽에서 목조건물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심에 있는 대부분의 오래된 목조건물을 파괴하고 콘크리트로 된 새로운 현대식 건물로 교체하는 스타방에르를 위한 새로운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는데, 당시 스타방에르의 도시건축가였던 Einar Hedén의 반대로 1956년 시의회는 도심의 일부를 보존하기로 결정해서 남아 있게 되었단다.

 

그 결과 173개의 건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각 건물은 공예품점, 미술관, 예술가를 위한 스튜디오로 활용되고 있다.

 

일부 건물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지만, 대부분은 개인 소유로 실제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건물들은 대부분 붉은 기와와 화이트 컬러로 칠해져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흰색의 목조주택이 잘 보존된 구시가지는 흰색 페인트가 비쌌던 시절에는 부의 상징이었으며, 지금은 보전지역으로서 의무적으로 흰색만 칠해야 하는데, 대문 색깔만은 자유란다.

 

작은 공원도 예쁘게 꾸며져 있다.

 

돌길도 비에 젖어 미끄럽지만 참 정겹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불편하다고 벌써 갈아치웠을 텐데, 불편을 감수하고 전통을 보존하는 노력이 본받을 만하다.

 

좁은 골목길로,

 

플롬에서 본 크루즈가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어제 다녀온 프레이케스톨렌까지 피오르를 유람하는 유람선이라고 한다.

 

 

 

 

쇼핑하러 들어간다.

입구에서는 트롤(Troll)이 맞이하고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트롤'이라는 거인족의 후예라고 말하는데, 거인족은 북유럽 신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존재다. 태초에 천지창조의 기원으로 작용한 주체가 바로 거인 '위미르(Ymir)'이기 때문인데,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태고의 혼돈 긴눙가가프(Ginnungagap)에서 처음 생겨난 생물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거인 위미르였다.

 

냉기가 올라오고 모든 것들이 암울한 니플헤임(Niflheim)의 얼음 안개와 뜨겁고 밝게 빛나는 무스펠스헤임의 열기가 만나는 긴눙가가프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상고대와 따뜻한 바람이 만나자 얼어붙어 있던 것들이 점차 녹아내리게 되었고, 열기가 지속되자 계속해서 물방울이 맺히게 되었다.

 

떨어진 물방울들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위미르였다. 잠을 자고 있던 위미르의 양쪽 겨드랑이에서 남녀 요툰(jǫtunn)이 탄생했고, 발에서는 머리가 여섯 개 달린 괴물이 태어났는데, 그들은 흐림수사르, 곧 서리 거인족을 형성하여 니플헤임에서 살았다.

 

한편 신들은 위미르가 아닌 부리에게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부리의 손자인 오딘(Odin)과 빌리(Billy), 베이(Bey) 삼형제가 위미르를 죽이고 위미르의 시체로부터 세계를 만들었다. 위미르의 피는 니플헤임을 가득 채워 홍수를 일으켜 베르겔 미르부부를 제외한 모든 거인들을 익사시킨다. 그 후 위미르의 살로 대지를, 그의 피로 바다를, 그리고 그의 뼈로 구릉을 만들고, 그의 머리칼로는 초목을, 그의 해골로 하늘을 만들었다고 한다.

 

북유럽 신화 최고의 신인 오딘(Odin)은 발키리(Valkyrie)를 부려 전장에서 죽은 전사들의 혼을 모았고, 이렇게 거둔 전사들의 혼은 오딘의 궁전 발할라(Valhalla)에서 에인헤야르(Einherier)라는 오딘의 전사로 부활한다. 이들은 낮에는 들판에서 편을 갈라 싸워 서로 죽이고, 밤에는 다시 부활하여 궁전에서 발키리들의 시중을 받으며 제림니르(Serimnir)라는 죽여도 죽여도 또 나오는 돼지고기를 먹으며 연회를 여는 삶을 라그나로크(Ragnarǫk)의 날까지 반복한다. 이렇게 영원히 서로 죽고 죽이는 몹시 거칠고 과격한 삶을 사는 곳이 북구 전사들의 낙원이었다.(출처: 나무위키)

 

이 이야기는 북유럽 신화에서 태초의 인간과 거인족이 탄생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며, 스스로를 티롤의 후예라고 말하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좋아하는 인형도 못난이 인형을 닮은 트롤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트롤이라고 칭하며 북유럽 신화 속 인물로 포장하고 있는 노르웨이인들의 비범함은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상징을 조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르웨이에서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북유럽 신화가 생활밀착형 신화라는 이유도 이 때문이란다.

 

항구를 지나서,

 

요트들도 많이 보인다.

 

지나 온 구시가지

 

 

유람선이 달려나간다.

 

 

이젠 색채의 거리(Fargegaten)로 나선다.

EBS의 '걸어서 세계속으로'에도 소개된 이곳은 상권이 쇠락해가던 Øvre Holmegate 거리를 미용사인 'Tom Kjørsvik'의 주도로 알록달록 원색으로 칠하기 시작하여 거리에 활기를 불어넣어 현재 가장 핫한 곳이 되었다.

예술가 'Craig Flannagan'은 집 그림을 위한 색 구성표를 만들었고, 그 계획은 집주인과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 4년여에 걸쳐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가 의회에서 최종 승인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밝은 색상의 조합에 회의적이었는데, 막상 거리가 조성되자 그 의구심은 열정적인 지지로 바뀌었다.

 

2005년에는 자동차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그 이후로 활기찬 보행자 거리가 되었고, 숨겨진 특징은 각 집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미니어처 우편함이 각 건물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우편함이 자기집 모양이라는데 닮았는지 잘 모르겠다.

 

구시가지에 비하면 무척 활기차다.

 

 

 

도시투어 버스가 이 좁은 골목에도 돌아다니고 있다.

 

큰 버스가 잘도 빠져나간다.

 

 

항구 주변 건물

 

점심 먹으러 왔더니 아직 12시가 안 됐다고 문을 안 열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린다.

 

각자의 취향대로 주문하여 먹기로 하는데, 양이 푸짐하고 입맛에도 잘 맞는다.

 

식사 후 발베르그 타워(Valberg tower, Valberget Utsiktspunkt)로 간다. 발베르그 타워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인 발베르그(Valberg) 언덕에 지어진 26.66m 높이의 화재감시탑이며, 입장료를 내고 망루에 올라 스타방에르를 관람할 수 있다. 옛날 주택은 모두 목조건물이라 화재가 자주 났다고 하며, 화재가 나면 종을 울렸다고, 구시가지 곳곳에 소방호스가 있다.

 

첫 번 째 탑은 1658년에 세워진 8각형 2층의 목조로 된 탑으로 영국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의 일환으로 세워졌고, 탑의 정상에는 불이 나거나 적의 공격을 경고할 수 있도록 청동종을 설치하였다. 1849년 새로운 탑 건설을 위해 3,200스페시달러의 특별 기금을 조성하여 1850~1853년에 지어졌다. 최종 건설비용은 9,000스페시달러 이상이 들어갔는데, 1852년 스타방에르시의 총예산이 8,770 스페시달러인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액수였다고 한다.

 

탑에서는 항구가 멋지게 내려다 보인다.

 

뒤로 가면 총포도 있다.

 

옆에는 어린이 놀이터인 듯,

 

멋진 카페도 있다.

 

다시 시가지로 들어간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한가로운 공원에 앉아 라떼 한 잔 즐기면서,

갈매기가 유모차 아이에게 빵을 낚아채서 먹는데, 다른 새들이 먹으려다 쫓겨난다.

 

얘들이 갈매기를 쫓아보려고 하는데, 마구 덤벼드는 사나운 갈매기가 만만치 않다.

 

공원 갈매기의 횡포

 

 

스카겐 광장 (Skagenkaien)​​으로 나왔다. 저기 보이는 스타방에르 대성당(Stavanger Domkirke)은 현재 남아 있는 북유럽의 11세기 이전 지어진 종교 건물들 중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무려 900년 역사의 대성당이다. 1100년대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125년경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국 건축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노르만 양식의 석조 건축물이다. 16세기 노르웨이의 종교 개혁 이후에는 루터파 교회로 사용되고 있단다.

 

광장에는 노점상들 차지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쉬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기로 한다.

 

숙소 주변 풍경

 

 

다시 홀로 스카겐 광장(Skagenkaien)으로 나온다.

 

날씨는 개였지만 여전히 짙은 구름이 끼여 있다.

 

점점 푸른 하늘이 보이는 듯하다.

 

스카겐 광장​​ 항구 앞에는 해군기념비(Sjøfartsmonumentet)가 서 있다.

 

이곳은 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 2007년 수상자 라젠드라 파차우리 (Rajendra K. Pachauri) 등 여러 노벨상 평화상 수상자들과 평화 옹호자들의 풋 프린팅이 있는 평화의 길(Path of Peace)이란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여사의 풋프린팅도 찾았는데,

 

해군기념탑 근처에 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풋프린팅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아마도 오늘 저녁에 열리는 유로축구 결승경기 단체응원차 임시로 가설한 저 천막 아래에 있지 않을까 한다.

방금 보트가 쏜살같이 들어온다.

 

저녁 먹으러 3번째로 나오니 하늘이 예술이다. 내일 있을 마지막 쉐락볼튼 트레킹을 축복하는 듯하다.

금세 젊은이들이 바글바글 모였다.

우리도 곁에 자리를 잡고 저녁을 먹는다.

 

별로 크지도 않은 한 잔에 16,000원이나 하는 아주 비싼 노르웨이 맥주다.

 

음악소리에, 사람들 떠드는 소리에 시끌벅적하다. 자기네 나라 경기도 아닌데 열기가 대단하다.

 

요리 한가지씩 골고루 시켜서 나눠 먹는다.

 

유로축구 관람은 포기하고 내일 있을 쉐락볼튼 트레킹을 위하여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그동안은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와서 제대로 못 느꼈는데, 밤 10시경의 하늘 표정으로 백야를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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