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불로장생을(不老長生) 꿈꿨던 진시황의 영원한 안식처 병마용갱(兵馬俑坑)

by 새인1 2024. 5. 20.
반응형

◆ 2024년 5월 3일 ~ 6일까지 3박 4일 동안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박물관과 화산(華山, 2,154.9m), 숭산(嵩山, 1,512m)을 탐방하고 온 기록으로, 첫날 일정은 오전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안으로 이동하였고, 오후에는 시안의 상징인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꿨던 진시황의 영원한 안식처인 병마용 박물관을 관람했다.

 

  개  요 :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의 무덤으로 능묘는 37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km, 높이는 40m에 달한다고 하니,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텐데, 아직 내부는 개발되지 않아 볼 수가 없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발굴이 진행중이라 한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 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과 정교함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 예술작품이라 한다.

 

청주에서 새벽 3시 30분 비몽사몽간에 출발하여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밝은 햇살이 맞아주었다.

 

아침 9시 15분 인천 영종도를 날아올랐다.

 

문갑도, 선갑도, 굴업도 등 옹진군의 섬들이 보이고,

 

1시간을 날아오니 중국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광활한 대륙이다.

 

바다까지도 매립하고,

 

 

사막지대를 지나는 듯하다.

 

시안이 가까워지니 공장지대도 보인다.

 

 

인천에서 3시간 30분 만에 목적지인 시안(西安)에 도착하니 봄비가 세차게 내린다.

 

중국이 요즘 노동절 시즌(5일 연휴)이라 어딜 가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라서, 지체되는 시간을 감안하여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점심을 과일로 준다.

첫날 일정으로 병마용 박물관을 들르기 위해 버스로 약 1시간 이동했는데, 엄청난 차량과 인파로 도로에서 내려 약 1km를 걸어간다.

 

시안(西安)은 서역인들이 왕래한 무역 중심지이며, 당나라 땐 세계 3대 도시였다. 시안에 있는 명나라 시대의 종루는 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중국 내 종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오늘날 남아있는 시안의 성벽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며, 진시황 때 만들어진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兵馬俑) 갱(坑)은 진시황릉과 함께 시안의 상징적인 역사 유적지다.

 

세간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얘깃거리를 묘사할 때 '장안(長安)의 화제'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에서 기원했다. 시안의 옛 이름인 '장안'은 중국에서 수도를 이르는 대명사로 널리 쓰이는데, 수도에서 화제가 될 만큼 큰일이라는 의미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기복광장(祈福廣場)은 썰렁하다.

 

병마용과 황제 전용 의자를 전시해 놓고 사진을 찍어준다.

 

입구로 들어가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꾼 진시황 동상이 반겨준다.

 

사람들이 많아서 인증하기도 어렵다.

 

비가 오는데도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그래도 입구에서는 수월하게 진행된다.

 

박물관 건물 입구에서는 여권으로 신분 확인받느라 지체된다.

 

병마용 박물관은 2-3-1호갱 순서로 관람해야 좋다는데, 우린 1-3-2호갱 순서로 관람했다.

'진병마용1호갱유지(秦兵馬俑一号坑遺址)'란 현판은 소전체(小篆體)라는데, 소전체는 중국을 처음 통일하고 제정한 서체로 지역마다 자형이 달랐던 대전체(大篆體)를 모아 정리해 승상 이사(李斯)가 지어 바친 것이란다.

 

내부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있어서 간신히 뚫고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 가이드 말이 중국에서는 새치기가 기본이란다.

 

예로부터 시안 일대는 산맥과 고원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고,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 덕에 인구와 물자가 풍부했다. 이 때문에 과거 중국에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차지해야 할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요충지를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이 지역에 수도를 세운 중국 왕조는 주(周)나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였으며, 이후 주나라가 쇠락하고 여러 국가가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가 시작된다.

 

이후 혼란한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가 기원전 4세기 시안의 북서쪽에 있는 웨이수이(渭水)강의 북쪽 기슭 함양(咸陽)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시안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다. 중국통일 후 제1대 황제에 오른 진시황(재위 기원전 247년~기원전 210년)은 함양으로 약 12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도읍의 영역을 남쪽으로 더 확장했다. 진시황이 자신이 묻힐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 진시황릉과 흙으로 만든 병사와 말이 대규모로 묻혀있는 병마용갱은 시안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로,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불멸을 꿈꾸던 시황제도 49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폭정으로 피폐해진 진나라는 농민반란으로 3대 만에 멸망한 뒤, 중국을 재통일한 한(漢)나라의 초대 황제 고조 유방은 함양이 있던 자리에 수도 장안(長安)을 세웠다. 장안은 '영원히 평안하다'는 뜻으로 이후 장안은 오랫동안 중국 도읍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무제 때는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장안을 통해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문화 교류가 이뤄졌으며, 인도의 불교도 이때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장안은 당나라 때 화려하면서도 개방적인 국제도시로 번성했지만, 이후 여러 왕조의 부침을 겪으면서 명(明)나라가 건국된 후 14세기 장안은 '시안(西安)'이 된다. '서쪽을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으로, 오늘날 남아있는 시안의 성벽은 이때 구축된 것이라 한다.

 

병마용(兵馬俑)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으며,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발굴이 진행중이라 한다. 그 후 농부는 최초 발견의 부상으로 경운기 1대를 받았다고 한다.

 

가장 먼저 발굴된 1호갱에는 주력 전투부대인 좌군(左軍)이 배치되어 있는데, 6,000여 구의 기병, 보병의 병마용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그중 완벽하게 복원을 마친 1,050여 점의 병사가 발견 당시의 대형으로 서 있는 것이라 한다.

 

1호갱 지하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병마용 5,000여 구가 잠들어 있다는데, 원래 병마용은 발굴 당시에 머리는 검은색, 얼굴은 연한 황색, 갑옷은 청색 등으로 채색된 상태였는데,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색상이 날아가 버렸단다. 그래서 2008년부터 발굴이 중단되었다가 2015년에 다시 재개되었다고 한다.

 

병마용은 얼굴, 몸통, 팔, 다리를 각각 진흙으로 빚어 붙인 뒤 말려서 1000℃의 가마에서 구운 후 광물안료와 옻칠로 채색을 했다. 이 광물안료는 부착력이 약해서 부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점성이 있는 반수(磻水)를 첨가하고 옻칠로 코팅을 했는데, 2,200여년간 흙속에 파묻혀 있던 병마용이 햇빛과 공기에 접촉하자 불과 몇 시간도 안돼 옻칠은 작은 알갱이로 수축해 바스라지고, 광물안료는 산화되어서 색이 전부 날아갔다고 한다. 또한 병마용의 거의 모든 무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발굴 당시에 이미 상당수가 부식되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 좌측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고온으로 구워내는 과정에서 빈 말의 몸통 내부의 공기가 팽창해 도용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뚫은 것이라 한다. 모든 병사의 표정과 머리 모양, 자세가 다르며 직위에 따라서 갑옷도 다 다르다고. 그래서 실제 살아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병마용의 발마다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잘못 납품된 병마용을 발견하게 되면 제작자는 엄벌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러니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했고, 정작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완성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2,200년 전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으로, 병마용은 진시황을 사후에도 보좌하고 호위하기 위한 부대였으며, 놀랍게도 출토된 병사들 얼굴이 저마다 다르고 실제 사람처럼 키가 170~180cm에 달하며, 예술성으로 따져도 현실주의를 완벽하게 따른 걸작이란다.

 

멀리 보이는 병마용은 아직 복원중이다.

 

이런 압도적인 유적을 남긴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나라의 32대 군주이자 6대 왕, 그리고 초대 황제(皇帝)이다. 진시황은 BC 259년에 태어나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상방 여불위의 섭정 아래 진나라 최고 지도자가 된 그는 이사와 함께 재위 27년차인 39살에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다. 그는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각 행정지역에 중앙정부 소속의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였고, 법가사상(法家思想)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경서를 없애는 등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켰다.

 

또한 전국을 통일하여 지역간 교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화폐를 반량전(半兩錢)으로 하고, 서체를 소전체(小篆體)로 통일시켰으며, 도량형과 수레바퀴의 폭도 통일시켰다. 하지만 아방궁(阿房宮)과 만리장성(萬里長城), 진시황릉(秦始皇陵), 운하 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해 민심을 잃었고, 말년에는 수은 중독과 불로초(不老草) 찾기 등으로 심신이 피폐해졌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전국 순행을 하던 도중 BC 210년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치하에서 대규모 토목공사와 엄격하고도 잔인한 법가사상에 입각한 통치로 백성들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군주였지만 3대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발굴 당시에는 진나라의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으나 '상방 여불위 3년에 사공구가 만들다(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는 글자가 적힌 극(戟)이 발견되어 진나라의 유물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입구쪽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복원중인 병마용을 넣어서 인증한다.

 

1호갱을 나와 3호갱으로 들어간다.

 

3호갱은 들어서자마자 말 4필과 마부, 호위무사 3명의 병마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황제가 탄 마차를 모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3호갱은 황제의 호위부대 중 지휘군에 해당하는 군막(軍幕), 중군(中軍)이 묻힌 곳으로, 68명의 무사용과 4필의 말, 채색된 목제 전차 1량이 발굴되었다.

 

이곳 병사들은 전투용 병기로는 잘 쓰지 않고 의장용 병기로만 사용되던 동창을 들고 있고, 제사를 지내고 점을 친 짐승뼈 등이 출토되어 사령부로 추정한다고 한다는데, 서로 마주 본 상태로 도열한 병마용들은 전투용이 아닌 경호대형이라 한다.

 

말들도 실제 살아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내달릴 것 같다.

 

3호갱을 나오니 2호갱 입구가 보인다.

 

2호갱은 황제 호위병 중 지원부대이자 특수부대인 우군(右軍)이 묻힌 곳이며, 병사가 도열한 1호갱과는 달리 궁노병, 보병, 기병, 전차가 혼합된 부대의 모습이란다. 89량의 목제 전차와 전차용 말 356필, 기병용 말 116필, 1,300여명의 보병 병마용이 발굴되었는데, 아직 발굴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웃는 모습이 너무 천진난만하고 평화스러운 중급장교의 병마용인데, 진나라 시대 장교의 갑옷 복식을 알 수 있고 당시 군사들의 갑옷 착용률이 높은 것을 짐작케하는 귀중한 유물이란다.

 

고삐와 활을 쥔 기병과 안장을 얹은 말의 모습을 한 병마용인데, 말과 함께 출토된 기마병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서서 쏴 자세를 한 병마용은 갑옷을 두르지 않은 일반 병사란다. 활을 쏘려고 준비하는 모습인데 왼손으로는 활을, 오른손으로는 활시위를 잡고 있는 자세로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에 인기가 많다.

 

진시황은 군현제 실시, 문자·화폐·도량형 통일 등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치적을 많이 세웠지만, 만리장성이나 아방궁 축조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분서갱유 사건 등 엄청난 폭정을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쨌거나 그는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고, 전설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중국 역사를 시작한 전설상의 황제들)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자신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제국을 이어 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이다.

 

이곳은 진시황이 타던 청동 마차 모형이 1/2크기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다는데, 지금은 대여해 나가고 없대서 패쓰했다. 실제 청동 마차 크기로는 재현이 불가능하여 1/2 크기로 재현했다고 하니, 옛사람들의 솜씨가 현대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듯하다.

 

말 4필이 끄는 사마거(駟馬車)라는데, 제작연대는 BC 210년으로 추정하며 복원에만 8년의 세월이 걸렸단다.

★★ 진시황릉은 시안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당시 수도였던 함양의 도시계획과 진시황의 궁전을 그대로 반영해 설계했으며, 동서로 485m, 남북으로 515m, 높이는 43m에 달하는 거대한 능이다. 진시황 즉위 직후인 BC 246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해 약 37년의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약 70만 명의 죄수를 포함하여 34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고 능 내부는 도굴을 염려하여 자동 쇠뇌 발사장치와 수은이 흐르는 강과 바다를 두었단다. 능 내부에는 겹겹이 벽을 설치해 습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모방한 거대한 장방형의 비밀궁전이다. 또한 내부에는 인어(人魚, 듀공)의 기름으로 만든 초가 있어서 불이 꺼지지 않게 했다고 한다. 진시황은 궁궐, 보물, 그리고 신하와 동물의 모양을 본딴 인형(병마용)을 부장하는 것에 그쳤지만, 그의 뒤를 이은 2세황제(二世皇帝) 호해(胡亥)는 진시황의 후궁과 자녀 모두를 끔찍하게 처형한 뒤 순장(殉葬)시켰으며, 능원의 공사와 후궁의 매장이 끝난 후에는 묘역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계장치를 만든 장인과 노역에 종사한 노예, 죄수 모두를 그대로 묘역에 가둬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진시황릉의 이야기는 이곳 시안(西安) 시골에서 구전되다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1974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 갖은 고초가 느껴지면서 마음이 아프지만, 또한 현재는 이런 선조들의 고초가 후세들의 돈벌이 수단이 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이젠 병마용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숭산 트레킹을 위해 시안북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낙양으로 이동한다.

 

역사가 마치 국제공항 수준이다.

 

시속 300km가 넘는다더니 1시간 35분 만에 낙양 용문역에 도착한다.

 

낙양용문(洛陽龍門)역을 빠져나온다.

황하의 상류, 허난성 낙양(洛陽, 뤄양)은 기원전 770년에 처음으로 주나라의 수도였으며, 그 뒤 후한과 위, 진, 조, 삼국시대의 위나라, 그리고 서진과 북위, 수나라 때 양제와 무주, 오대 때의 후당 등 아홉 왕조의 수도가 되었는데, 그래서 흔히 구조고도(九朝古都), 즉 아홉 왕조의 수도라 불린다. 특히 후한시대부터 당나라까지는 장안(지금의 서안)이 정치행정의 도읍지였다면, 뤄양은 당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한 국제적인 도시였다. 뤄양은 흥미진진한 소설 삼국지의 후한 말기 주요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궁녀로 들어와 당나라 고종의 비인 황후의 자리에 오른 후 나중에는 여황제가 되어 40년 이상 중국을 통치한 측천무후와도 인연이 깊다. 측천무후가 당시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보다 오히려 애착을 가지고 자주 왕래하면서 불사를 일으킨 도시가 뤄양이다. 또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칭송받는 이백과 두보, 백거이도 뤄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예술의 꽃을 피웠고, 유교에 철학을 담아 새로운 학풍을 만든 주자학이라는 중요한 학문이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뤄양은 중국내에서도 경제와 예술과 사상이 번성하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문화도시이고, 금나라 때까지는 왕이 살았던 도시라서 시내 곳곳에 유명한 고적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2부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