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 2024년 11월 5일(화요일)
♥ 산 행 지 : 경북 봉화군 선달산(先達山, 1,236m)
♥ 산행지 개요 : 강원도 영월군과 경북 봉화군, 영주시에 걸쳐 있는 선달산(先達山)은 백두대간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솟아있는 봉우리로 소백산맥에 속하며, 주변에 매봉산, 어래산, 봉황산 등이 있어 산세가 우아하고 풍경이 아름답다. 신선이 놀다가 먼저 올라야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선골, 칠룡골, 용아골 등의 이름을 가진 계곡들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남서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동남쪽 기슭에는 물맛 좋은 오전약수가 있다.
백두대간 선달산 산행은 오전약수에서 시작하여 박달령 - 선달산 - 늦은목이 - 갈곶산 - 봉황산 - 부석사로 진행하였다.
다녀 온 렘블러 궤적으로 15.3km를 5시간 51분 걸었다.
봉화군 물야면 오전약수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오전약수터 방향으로 향한다.
가물어서 그런가 물레방아는 쉬고 있다.
옆 계곡에는 물이 풍성하게 흐른다.
오전약수터에 들러 약수물 한바가지 마시고 간다. 물맛이 좋았다. 오전약수가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의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지역으로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고, 다른 말로는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렸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褓負商)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였단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 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약수터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동서트레일, 외씨버선길이라 그런지 등로가 잘 나 있었다.
서서히 가팔라지고,
골짜기 같은 길로 한참을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동서트레일과 외씨버선길 리본이 안내를 한다.
드디어 산행시작 1시간 만에 임도로 올라서고,
곧바로 백두대간 박달령(해발 973m)에 도착하여 인증을 한다.
박달령은 이런 곳이다.
박달령에서 선달산까지는 백두대간 길을 따라서 5km를 가야 한다.
헬기장에 올라서고,
잡목에 가려 조망은 없지만 백두대간 길이 편안하게 이어진다.
나목들은 겨울 준비로 잎들을 모두 떨구어 등산로가 푹신푹신하다.
기암도 지나고,
선달산은 저 멀리서 손짓한다.
박달령에서 1.4km 왔고, 선달산까지 3.6km를 가야 한다.
멀리 태백준령이 나무들에 가려 조망이 안된다.
완만하게 오르내리길 수차례 해야 한다.
간이쉼터를 지나고,
둥그런 바위도 지난다.
아직도 멀리 있는 선달산
뒤로는 태백의 준령들이 버티고,
기암 옆으로 지나간다.
선달산 1.1km 남았다.
봉우리를 넘어서,
뒤돌아보고,
드디어 선달산에 올라선다.
사방이 나무들로 막혀 있는 선달산(先達山, 1,236m) 인증
정상 주위에는 얼룩덜룩한 물푸레나무가 엄청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물푸레나무 사이로 간다.
이제 대간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간다.
늦은목이로 향하여 길게 내려간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미끄럽다.
늦은목이 0.9km 남았다.
화사한 낙엽송 단풍이 보이고,
푸르른 잣나무 군락지도 지나고,
드디어 늦은목이에 도착한다.
이곳은 소백산 권역이다.
늦은목이(해발 786m) 인증
갈곶산 방향으로 간다. 늦은목이에서 갈곶산까지는 1km이다.
지나 온 선달산 사면에는 잣나무들이 파릇파릇하다.
노랗게 물들고 있는 낙엽송
마구령까지는 5km이다.
잠시 가파르게 오르면,
갈곳산(해발 966m)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금줄을 넘어 봉황산으로 간다.
낙엽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서 미끄럽다.
봉황산은 저 멀리서 손짓한다.
등산로도 희미하여 잘 찾아가야 한다.
정상석은 없고 나무에 걸린 봉황산(鳳凰山, 822m) 표지판에서 인증, 상서로운 이름을 가졌는데, 잡목에 둘러싸인 산봉우리는 초라하다.
이젠 부석사를 향하여 희미한 산길로 가파르게 치고 내려간다.
잡목에 얼굴을 맞아가며,
넓은 임도가 나오고,
부석사 조사당으로 내려선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은 국보 제19호로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 영정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벽 안쪽에는 고려 후기에 그린 벽화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을 수리할 때 벽화를 떼어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는 국보(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사찰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제석천·범천·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뜬 그림을 복원해 두었다. 조사당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까지의 사찰 건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철창에 갇혀 있는 이 나무는 조사당 선비화(祖師堂 禪扉花)라고 하며,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骨擔草)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고. 일찍이 퇴계 이황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단다.
보물 만나러 응진전으로 가는 길목에 단풍이 참 곱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집으로 이 건물의 공포(栱包)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翼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응진전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자인당(慈忍堂)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보물 제220호)이다.
자인당 안에 모셔진 북지리 석조여래좌상(北枝里 石造如來坐像)은 보물 제220호이며, 세 분의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인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은 세 분의 석조여래좌상 중에 양편에 모셔진 두 분의 비로자나불상이다. 대좌와 광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물로 8각의 하대석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중대석에는 앉아 있는 형태의 불상과 연꽃 등을 공양하는 보살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동쪽 불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으며, 서쪽 불상은 동쪽 불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신체를 표현하는 선들이 부드러운 편이다. 세 분의 불상 중에 가운데 모셔져 있는 불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내의, 內衣),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의 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사자, 합장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불상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세 불상 모두 부석사 인근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으며, 조각수법이 같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돌아나와 무량수전으로 내려간다.
무량수전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연봉들의 조망이 멋지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은 보물 제249호이며, 2단의 바닥돌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이다. 기단부의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탑신부의 몸돌은 각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몸돌 위에 놓인 지붕돌은 밑면 받침을 5단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상륜부의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탑은 본래 법당 앞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석탑은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어 이채롭다.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선묘각이 있는데, 의상대사의 창건설화와 관련된 선묘낭자를 모신 전각이다.
선묘각 내부에 걸려 있는 선묘낭자의 영정은 1975년에 그린 것이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 유래가 된 이 바위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있으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어있지 않고 떠 있어서 '뜬 돌'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었다.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의상대사는 깨달음을 얻고자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마음을 두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후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많은 이교도(異敎徒)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들을 물리쳤다. 그래서 이 돌을 부석(浮石)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영원토록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깃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단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이며,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무량수전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극락전 또는 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의 중심법당으로 무량수(無量壽)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중간이 두껍고 아래와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이어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栱包)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고려시대 사찰 건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무량수전 안에 모셔진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은 국보 제45호이며, 소조여래좌상이란 나무로 앉아 있는 모습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붙여가면서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불상은 높이 2.78m 크기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부처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진리의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에 따로 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손모양은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이러한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조여래좌상이 있는 전각 이름이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파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무량수전이라는 점과 부석사 원융국사비에 '좌우에 다른 보처(補處) 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다른 사찰의 불상과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모셔져 있고 시선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배치에 대해서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 계시기 때문에 서쪽에 모셨다는 설,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유사한 느낌의 공간감을 만들고자 의도했다는 설 등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불상이며,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예술적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석등(石燈)은 국보 제17호이며, 석등은 불을 켜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돌로 만든 등으로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보통 대웅전이나 탑 앞에 석등을 세우는데,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이 얹혀있는 구조이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맨 아래에 네모난 바닥돌이 있고 그 위에 3단의 받침돌, 화사석, 지붕돌이 차례로 놓여있는 모습이다. 바닥돌의 옆면에는 꽃모양의 장식을 새겼고,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8개의 연꽃잎을 표현하였다. 아래받침돌 위에 놓인 팔각기둥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인다. 팔각기둥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8개를 새겼다. 팔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만들었고, 창이 없는 나머지 4개 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팔각이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있는 모습으로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석등 앞에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향로를 놓았던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로서 각 부분의 정교한 조각 솜씨와 전체적인 비례감이 매우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화려한 듯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의 석조 예술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양루(安養樓)는 무량수전 앞에 놓인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은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른데,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安養樓)라고 쓰여 있다.
안양(安養)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인 것이다.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는 듯 외부공간이 확장되어 다가온다.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단다.
부석사에 오면 높다란 석축과 돌계단을 볼 수 있는데,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으로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이기도 하지만, 석축과 돌계단 자체에도 상징하는 바가 있다고.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란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에 다다르는 마지막 계단이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란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이 아니라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었다는 사실이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 있다.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뒷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목수가 왜 그리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지혜로움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 앉아 있는데, 볌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 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범종각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범종각 아래 양쪽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삼층석탑(三層石塔)은 처음부터 함께 만든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원래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이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옆에 있는 보물인 삼층석탑과도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지만, 지붕돌받침이 4단이고 바닥돌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 무량수전 옆의 삼층석탑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졌다고 판단된다.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 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머리 장식부는 없어져서 새로 만들어 얹었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으면서 짜임새가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범종각으로 오르는 중품단
하품단을 오르는 사람들
진입로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많이 떨어져서 운치를 더한다.
따스한 날씨에 철쭉이 피어 당간지주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보물 제255호로 절에서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부석사는 해동화엄종찰이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을 나서며,
부석사는 통도사, 선암사, 봉정사, 대흥사, 법주사, 마곡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록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부석사의 본래 그 자리란다.
다녀 온 봉황산이 부석사를 품고 있는 날렵한 봉황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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