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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사막에 피어난 위대한 문명 이집트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

by 새인1 2026.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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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룩소르의 유적들은 크게 나일강을 기준으로 동안과 서안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안이 산자를 위한 곳이라면 서안은 죽은자들을 위한 곳으로, 그 이유로는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지기 때문이다.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신비로운 곳 중 하나가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인데, 수천년 전의 건축기술과 천문학적 정밀성,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관이 과학적으로 녹아 있는 '거대한 역사 실험실'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나일강 서쪽 룩소르(Luxor) 지역의 깊은 산속에 자리한 이곳은 신왕국시대(기원전 16세기~기원전 11세기)의 왕들이 영생을 꿈꾸며 잠들어 있다. 왕가의 계곡은 사막 산맥 안쪽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지질학적, 기후적인 이유에서 선택된 것이었다.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벽화와 미라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것은 이러한 사막의 건조한 환경 덕분이며, 또한 사막의 깊은 산속 외진 곳이라 외부의 접근이 어려워 도굴을 막는 천연 요새 역할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La)가 매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과정을 죽음과 부활의 순환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왕가의 계곡이 나일강의 서쪽 태양이 지는 방향에 위치한 것이다. 이는 곧 사후세계로 향하는 길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또한 일부 무덤의 복도와 천정은 별자리의 움직임과 일치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태양이 밤에 하늘 여신의 몸을 지나 새벽에 다시 태어난다는 고대 천문학적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

 

왕가의 계곡으로 가는 아침 풍경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모스크 첨탑

 

나일강에 보이는 펠루카 깃대들

 

나일강에 떠 있는 대형 크루즈들

 

또 다시 룩소르 신전을 지나간다.

 

룩소르 랜드마크

 

벽에 장식된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도 보이고, 핫셉수트 장제전과 아부심벨 람세스2세 대신전도 보인다.

 

 

미용실일까?

 

나일강을 건너간다.

 

이른 시간이라 도로도 한산하다.

 

한참을 달려 왕가의 계곡으로 접어든다. 이집트에서 도굴의 역사는 이집트 역사와 함께 할 정도로 오래되었는데, 고왕국 파라오들이 내세의 영생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재화를 투자했던 피라미드는 중왕국 이후 감당할 수 없는 건설비용과 도굴꾼들 때문에 기피하게 된다.

 

결국 신왕국 제18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아멘호텝1세(AmenhotepⅠ, 재위 BC 1525~1504)는 무덤 조성에 혁신을 가한다. 고왕국과 중왕국 파라오들이 무덤과 장례신전을 한 곳에 건설하여 도굴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알고, 무덤과 장례신전을 따로 짓도록 했다.

 

그러자 세 번째 파라오인 투트모세1세(ThutmoseⅠ, 재위 BC1506~1493)는 무덤과 장례신전을 분리하는 외에 파라오가 영면할 수 있는 장소를 비밀리에 찾게 하였고, 나일강 서부의 데이르 알-바흐리(Deir el-Bahari)에 있는 황량한 사막, 장마철 외에는 물이 없는 계곡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이후 신왕국 파라오들이 그곳에 묻히기 시작했으며, 람세스 11세까지 약 500여년간 왕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근세에 이곳에 발견되면서 오늘날에는 '왕가의 계곡'이라 불리는 이곳이다.

 

이곳에서 매표를 하고, 티켓 1장으로 3개의 무덤을 볼 수 있으며, 투탕카멘과 세티1세, 람세스5세, 6세는 추가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설명을 듣는다. 왕가의 계곡 모형도가 땅속을 표현하느라 특이하게 생겼다.

 

2017년 4월에도 3600년이 된 미라와 고대무덤, 1,000여 점의 유물이 새로 발굴된 왕가의 계곡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왕릉이 모여 있는 골짜기로 지금도 여전히 발굴중이며, 이곳에는 파라오의 무덤이 60개 이상이라고 하는데, 계곡 주변으로는 최소 450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은 파라오 뿐만 아니라 왕족들, 귀족들, 심지어는 애완동물까지도 묻혔다고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고왕국 시대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눈에 보이게 거대한 무덤이라 도굴꾼들에게 '나 여기 있소!'하고 알려지다 보니, 이렇게 깊숙이 들어와 무덤을 만들었지만 역시나 도굴꾼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 멀리 엘 쿠론(El Qurn)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피라미드를 닮아 이곳을 왕가의 공동무덤으로 선정했다는 설도 있는데, 산세가 피라미드를 닮고 산줄기는 미라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란다. 마치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자연스레 연결된 것처럼~~~!

 

먼저 추가 구매한 투탕카멘[영어식 발음이고 원래 발음은 투트 앙크 아문(Tut Ankh Amun)]의 무덤을 찾았다. 이곳은 1922년 11월 4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Howad Carter)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황금마스크가 발견된 인기지역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 붐빈다는데, 정작 황금마스크는 이집트 대박물관에 가 있다. 복제품이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왕의 수명이 짧아서 무덤도 작고 볼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도굴 피해가 없어서 5,000점 이상의 유물이 나왔고, 약 11kg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황금마스크와 황금관, 황금의자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황금 가면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투트 앙크 아문(Tut Ankh Amun)의 무덤을 발굴했던 카나번이 모기에 물려 죽은 걸 시작으로 무덤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 13명이 한명씩 원인불명의 병이나 자살 등으로 사망함으로써,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세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발굴작업을 총지휘했던 하워드 카터는 천수를 누렸고, 독일의 고고학자 슈타인도르프의 조사에 따르면 도굴과 관련된 사람들의 죽음은 발굴과 연관이 없었다고 하는데,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 '파라오의 저주'로 인해 투탕카멘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그래도 무덤이 작고 눈에 띄지 않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는데, 보존상태가 좋아 벽화의 그림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하다.

 

정면 오른쪽에는 장례를 집전하는 제사장이자 후계자 아이(Ay, 표범가죽 입은 사람)가 죽은 파라오 투탕카멘의 입을 여는 의식을 행하는 장면으로, 이는 망자가 내세에서 자신의 감각을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투탕카멘이 흰 옷차림으로 지하세계 통치자인 오시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시리스의 상징인 아테프(Atef)왕관, 즉 상이집트의 상징인 흰색 왕관(헤제트, Hedjet)에 두 개의 타조 깃털과 금박의 우라에우스(Uraeus, 코브라)가 달려 있는 왕관을 착용하고 있다. 그의 양손에는 권력의 상징인 도리깨(네카카, Nekhakha)를 들고 있으며, 그의 목에는 목과 가슴까지 감싸는 넓은 목걸이라는 뜻의 우세크 칼라(Usekh collar)가 걸려 있다. 이 목걸이는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 집단에서 사용한 장식품이자, 몸을 보호하는 마법을 가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우세크 칼라 아래에는 아침의 태양을 관장하는 케프리(Khepri)신의 모습인 스카라베(Scarab, 쇠똥구리) 장식이 보인다. 이는 쇠똥구리가 동그랗게 만든 똥을 굴리고 가는 모습이 마치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하늘을 가로 질러 서쪽으로 지는 모습을 연상하여 만들어낸 상징이다.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의 신 케프리가 부활을 상징하여,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심장 위에 케프리의 상징인 스카라베 장식을 마아트(Maat)의 깃털보다 가볍게 해달라는 기도문과 함께 올려 놓았다. 오른쪽 새로운 왕 아이의 모습은 투탕카멘보다 어리게 묘사되어 있는데, 준제사장의 팬더 가죽 망토를 입고, 우라에우스가 새겨진 청색 왕관(케프레시, Khepresh)을 쓰고 있으며, 발에는 흰색 샌들을 신고 있다. 한편 청색왕관은 신왕국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파라오가 전쟁에 나갈 때나 중요한 의식을 행할 때 착용했다. 참고로 상이집트를 의미하는 흰색 왕관을 헤제트(Hedjet)라 하고, 하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데슈레트(Deshret), 통일 이집트의 두 왕관을 겹친 것을 프쉔트(Pshhent)라 한다. 가운데 그림은 살아 있는 모습의 투탕카멘이 하늘의 여신 누트(Nut) 앞에 나타나 사후세계로 이동하고, 좌측에는 투탕카멘이 오시리스를 껴안음으로써 사후세계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뒤에는 투탕카멘의 보디가드 카(Ka)가 서 있다.

 

투탕카멘의 후계자 아이(Ay)는 제사장을 지냈던 하이집트 권력자 유야(Yuya)의 아들이다. 유야는 아멘호텝3세의 장인이자 왕비 티예(Tiye)의 친정아버지로, 유야의 손녀이자 아이의 딸인 네페르티티(Nefertiti)가 아케나톤(Akhenaton)의 왕비가 됨으로써 왕실과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다. 이렇게 실력자가 된 아이는 투탕카멘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좌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게 되면서, 왕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투탕카멘의 왕비인 안케세나멘(Ankhesenamun)과 결혼한다. 그런데 안케세나멘은 네페르티티의 딸이고, 네페르티티는 아이의 딸이니 아이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외손녀와 강제로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추잡한 인물이다. 하지만 노령이었던 아이는 4년의 짧은 기간 재위하고, 이후 파라오 자리는 아이의 딸과 결혼한 장군 출신 호렘헤브(Horemheb)에게 넘어간다.그는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던 아케나톤의 아마르나 시대를 정리한 인물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파라오로 대접을 받는 람세스2세(Ramses II)가의 시조가 된다.

 

이 그림은 투탕카멘의 장례행렬로 흰색 상복에 흰색 머리띠를 두른 12명의 고위관리들이 투탕카멘의 미라가 든 관을 썰매에 싣고 운반하는 모습이다. 관은 태양의 배에 실려 있으며, 뱃머리에는 네프티스여신이, 선미에는 이시스여신이 작게 그려져 있다. 누워 있는 왕의 미라 위에는 카르트슈 비문이 있는데, '완벽한 신, 두 땅의 영주, 네브케페루르(Nebkheperoure, 쇠똥구리가 있는 카르트슈), 영원한 삶을 산다'라는 뜻이란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왕이 태양신과 함께 배를 타고 어둠의 시련을 이겨내고 다음 날 아침 부활을 암시하는 내용인데,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지고 다시 뜨기까지 12시간 동안 지하세계를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 그림은 암두아트의 서(The Book of the Amduat)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후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장례문헌 중 하나이다. '저승의 서'라는 뜻을 가진 암두아트는 주로 왕가의 무덤 벽화나 관의 내부에 새겨졌으며, 죽은 파라오가 태양신 라(La)와 함께 사후세계를 여행하며 부활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사후세계는 12개 구역(12시간)으로 나뉘며, 이는 개코원숭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상단에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쇠똥구리(스카라베: Scarab)가 함께 그려져 있는데, 이는 죽은 파라오가 태양신과 함께 지하세계를 지나 다시 부활하게 됨을 의미한다. 오른쪽 위에는 5명의 신들이 서 있는데, 마아트(Maat) 여신, 바크(Barque) 여신, 호루스(Horus), 슈의 카(the Ka of Shu), 네헤스(Nehes)이며, 이들은 고인들을 저승으로 정중하게 맞아들이는 역할을 하는데, 네헤스는 장례식의 신이다.

 

석관이라 한다.

 

왕들의 무덤은 즉위와 동시에 파내려가기 시작한다는데, 투탕카멘은 재위기간이 짧아서 무덤의 길이도 짧아 이렇게 한 통로가 전부였다.

 

투탕카멘의 미라도 보존되어 있었는데, 진짜냐고 물으니 흐미 진짜란다. 진짜 미라를 남겨 놓고 별도의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무덤이 너무 작아서 미라라도 있어야 사람들이 관람하러 들어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가이드가 말해준다.

 

투탕카멘 무덤 관람을 마치고 나와보니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다음은 람세스9세(Ramses Ⅸ) 무덤이다. KV 표기는 파라오 무덤의 표기 기호를 나타내는데, Kings Valley의 앞 글자를 따서 표기하는 것으로, 처음 람세스7세의 무덤을 발견한 영국의 고고학자 존 가드너 윌킨스(John Gardner Wilkinson)가 제안하여 사용한 것이다.

 

여기도 엄청난 인파가 몰려서 밀려 들어간다.

 

람세스9세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8대 파라오로 제20왕조에서 람세스3세, 람세스11세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다. 대략 18년 4개월 정도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고, 그의 통치기 내내 이집트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에 터진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면 아마 왕릉 도굴 사건일 것이다. 그가 재위한 지 16년 쯤 되는 해에 테베(룩소르)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릉들의 도굴 여부를 조사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싸그리 털려나간 상태로 발견되면서 당시 이집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선대 파라오였던 람세스6세의 무덤은 지어지고 나서 20년도 안 돼서 도굴당한 것으로 판명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왕릉들도 대부분 부장품이 도굴 당해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 도굴꾼들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던 람세스9세와 신하들은 경악했다. 당연히 제 무덤도 털릴 것을 우려한 람세스9세는 인근 지방의 총독들을 시켜 무덤들을 잘 간수하라고 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상형문자가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람세스(Ramses) 왕조는 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Horemheb)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군 사령관이었던 람세스1세(Ramses I)가 뒤를 이어 19왕조를 열었지만, 그가 실제로 통치한 기간은 3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세티1세(Seti I)와 람세스2세(Ramses II)로 이어진다. 람세스(Ramses)는 '태양신 라에 의해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람세스1세는 나일 삼각주 동부 출신으로, 이집트의 정치 중심지는 제19왕조가 시작되면서 나일 삼각주로 이동했다. 그의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세티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서 근동 지방에서 세력이 약해진 이집트 제국의 권위를 다시 확립했다.

 

오랫동안 이집트를 다스린 람세스2세(BC 1279~1213 재위) 때는 나일 삼각주 동부에 새로운 국제 도시인 수도 피라메세가 건설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건축물이 세워졌다.

람세스 2세의 후계자는 아들 메르넵타(Merneptah, BC 1213~1204 재위)였고, 그가 죽자 왕족 안팎의 파벌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다투었다. 결국 질서를 회복한 사람은 혈통이 분명치 않은 세트나크트(Setnakhte, BC 1190~1187 재위)였고, 그는 왕위에 올라 제20왕조의 시조가 되었으며, 세트나크트의 비문은 나라를 평정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그는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에 이 평정 작업을 끝냈다. 세트나크트의 아들 람세스3세(BC 1187~1156 재위)는 신왕국 최후의 위대한 군주였다.

그는 대규모로 침략한 리비아인을 무찌르고 수천 명의 적을 죽였으며, 나일 삼각주 어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해양민족들을 물리쳤다. 람세스 11세가 죽자 타니스 총독인 스멘데스가 왕이 되어 제21왕조를 세웠다.

 

 

 

 

 

 

 

 

 

 

 

 

 

 

아름다운 상형문자 앞에서 인증하고 람세스9세 무덤 관람을 마친다.

덜 붐비는 무덤 하나를 더 관람한다.

 

세 번째는 람세스3세(Ramses III) 무덤이다.

 

이곳은 그래도 사람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들어가고 관람하는데 좀 수월했다.

 

호루스에게 축복을 받는 람세스3세의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람세스3세의 무덤은 길이가 188m로 왕가의 계곡 중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복도, 방, 매장실까지 복도의 양쪽 벽에 '라의 서(Book of the La)'와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등 신화적 장식과 기도문이 연속적으로 새겨져 있다.

 

회랑도 무척 길다.

 

아름다운 상형문자

 

천정에는 별도 그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의 세 시대로 구분되곤 하는데, 그중 고대 이집트 신왕국 후반기, 즉 제19, 20왕조가 있었던 시기는 람세스 시대로 대부분의 파라오가 람세스(Ramse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이 람세스3세이다.

 

람세스3세는 20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이집트에서 큰 권력을 휘둘렀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그는 세트나크트(Setnakhte) 왕의 아들로 기원전 1186년부터 기원전 1155년까지 통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멸의 파라오 람세스2세가 서거한 후 그의 뒤를 이은 메르넵타(람세스2세의 13번째 아들)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왕자들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눴고, 궁정의 내시와 관리들은 마아트(Ma'at: 우주의 질서와 정의) 대신 자신의 주머니를 채울 탐욕을 선택했다.

 

제19왕조의 마지막은 이렇게 처참했고, 이름조차 희미한 군주들이 스쳐 지나갔으며, 마침내 출신이 베일에 싸인 세트나크트(Setnakhte)가 등장하여 강력한 군사력과 카리스마로 이집트를 유린하던 이방세력과 부패한 귀족들을 제압하여 제20왕조를 열었다.

 

그는 불과 2~3년의 짧은 통치기간이었지만 제20왕조의 초석을 다졌고, 그의 곁에는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던 젊은 사자, 람세스3세가 있었다. 그는 위대한 파라오 람세스2세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고 등극하였으니, 람세스3세라 한다.

 

람세스3세가 등극할 당시 이웃 그리스는 암흑기로 정치적인 혼란을 겪고 있었고, 이집트는 지속적으로 외부 침입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해상민족과 리비아인들의 공격이 심각했으며, 이후 20왕조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는 경제적 어려움과 내란도 격화되어가고 있었다.

 

재위 5년째 되던 해에 리비아 부족들이 연합해 자신들의 추장 후계 문제에 간섭했다는 구실로 나일강 삼각주 서쪽 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다. 그 전에도 리비아인들은 이집트 영토를 침범해 19왕조와 20왕조 내내 골칫거리였으나, 이들은 결국 삼각주 서부 지역 전투에서 참패하고 퇴각했다.

 

재위 8년에는 해상민족 연합군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에 람세스3세는 두 번의 육상전과 해전을 통해 이들을 물리쳤다.

 

이집트인들은 바다에서는 약체로 유명했으나 람세스3세는 해안을 따라 사수(射手)들을 배치하고 계속해서 나일 강변으로 다가오는 적함을 향해 화살을 쏘게 했다. 그런 다음 이집트 해군이 갈고리를 던져 적함으로 넘어가 백병전을 치렀고 결국 해상세력을 물리쳤다.

 

해리스 파피루스(람세스 4세가 아버지의 치적에 대해 적은 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의 국경에 도달한 자들의 심장과 영혼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다를 통해 다가오는 자들은 나일강 입구에서 불길을 마주했고, 해안에서는 그들 주위로 장창 부대가 방책을 쳤으며, 결국 해변에서 패배하여 살해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체더미에 던져졌다.'

 

람세스3세는 해상민족을 휘하에 복속시키고 가나안 남부 지방에 정착시켰으나 이것이 그의 명령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람세스3세는 또한 재위 6년과 재위 11년에 이집트 서부 삼각주를 공격하는 리비아족과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이 마지막 전쟁을 치른 후 람세스는 이집트 사회를 직업에 따라 계급화했다. 무역과 산업을 권장한 람세스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해안 지방 푼트에 해양 무역선을 보냈고, 시나이의 구리 광산과 이집트 남쪽 지방에 있는 누비아의 금광을 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이집트의 재정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는 아시아에서 이집트가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전쟁의 상흔으로 인한 첫 번째 고난은 람세스3세의 재위 29년에 기록된 노동자들의 반란이다.

 

세트마트에서 무덤을 축조하던 왕실 무덤 축조자들과 장인들이 음식 배급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파업을 일으켰는데, 이 파업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파업이라 한다. 중단되었던 작업은 이집트 전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상(上)이집트 고위 관리의 중재로 겨우 다시 시작될 수 있었다.

 

기원전 1140년까지 약 20년간 햇빛이 제대로 비치지 않아 식물이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아이슬란드 헤클라 화산 폭발로 추정) 이로 인해 람세스6세와 7세의 통치기에는 노예와 고기 가격은 그대로인데, 곡물 가격만 엄청나게 폭등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들은 람세스 3세의 공식 문서에는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저 그 유명한 람세스 2세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내용만 강조되었을 뿐이다.

 

그는 룩소르와 카르낙에 신전을 축조했으며 마디나트 하부에 그의 장례용 신전과 궁전, 복잡한 행정 건물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이집트에서 현재 가장 잘 보존된 유적이기도 하다.

 

이 건물을 보면 람세스 시대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육중한 성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들은 당시 외부 세력의 침입이 얼마나 빈번했는지를 증명해준다. 마디나트 하부 신전 벽에는 해상민족과의 육상 및 해상전쟁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람세스3세 시절의 파피루스 기록에는 마디나트 하부에서 벌어진 축제 기간에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음모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그의 두 아내 중 티예(Tiye)가 정통 후계자인 왕세자(람세스4세)가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낳은 펜타웨레트(Pentaweret)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사실 그녀의 아들은 둘째 아들이라 다른 아내인 이셋의 아들에게 왕위계승서열에서 밀려난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왕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결국 실패하여 관련자들은 재판정에 섰는데, 이 음모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주모자 티예와 아들 펜타웨레트, 람세스의 왕실 담당자 파베카멘(Pabekkamen), 7명의 왕실 하인과 2명의 국고 담당자, 병사 2명, 왕가의 친척 2명과 전령관 1명이었다.

 

주동자들 전원은 처형된 것으로 여겨지며, 재판에 회부되었던 몇 명은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 세 번의 재판을 통해 총 3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티예와 펜타웨레트는 내세의 삶을 누릴 수 없도록 무덤이 파헤쳐지고 이름까지 삭제당했다.

 

재판 기록을 제외하면 그들의 무덤에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당시 함께 고발되었던 하렘의 여자들은 재판관들을 유혹하려 했지만 결국 발각되었고, 유혹에 넘어간 재판관들은 큰 처벌을 받았다.

 

암살 계획이 성공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람세스3세는 이 처벌 기록이 완성되기 전 재위 32년에 사망했다. 그의 몸에는 어떠한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눈에 띄는 흔적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독약이 사용됐을 수도 있다.

 

람세스3세의 미라는 내세의 삶에서 뱀의 공격을 막아주는 목걸이를 걸고 있다. 음모자들 중에는 그의 음식을 담당한 하인들도 있었고, 뱀을 부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 람세스3세의 미라가 발견된 이후 그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 전형적인 이집트 미라로 등장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왕들의 계곡에서 가장 큰 무덤이기도 하다.(이상 다음백과에서 인용)

 

해양세력를 물리치고 지중해를 구원한 영웅이요, 무너진 제국을 일으킨 사막의 사자, 이집트의 마지막 수호자인 람세스3세의 무덤 관람을 마친다.

 

굳게 닫혀 있는 곳은 아직 발굴중이란다.

 

람세스2세의 무덤은 너무 유명한 파라오라 50년도 안돼서 모두 도굴당하고 잦은 홍수로 사실상 폐허가 되어 출입이 금지되었다.

 

가이드 말로는 람세스2세가 66년간 장기 집권(90세까지 장수함)하여 무덤이 상당히 클 것이라 아직 발굴중인데 언제 끝날지 모른단다.

 

저곳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위대한 여왕 파라오 핫셉수트(Hatshepsut)의 무덤도 있다고 한다.

 

4개의 무덤 관람을 마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돌아간다.

 

셔틀을 내려서,

 

상가지역을 통과하고,

 

왕가의 계곡 반대편에 있는 핫셉수트(Hatshepsut) 장제전으로 가면서 보이는 저 구멍들은 도굴꾼들이 파놓은 입구라고 한다.

 

도굴꾼들은 저렇게 집까지 지어놓고 도굴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만큼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오지이니 오죽했겠는가?

 

하긴 왕가의 계곡을 조성하면서 임금을 못 받은 인부들이 별도의 통로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었으니~~~!

 

 

 

어느 세월에 발굴이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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